<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엘리펀트> 下
자, 이전 글에서는 두 영화에서 관객과 인물 사이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사용한 기법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두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 그리고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먼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부터 시작이다.
사랑이라 함은 상대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존중으로 완성된다. 건강한 형태의 사랑은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받는 이는 자신이 다른 존재로 대체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빠지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현존'자체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랑은 소유욕으로 변질된다. 소유욕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현존을 부정하고, 강한 힘(폭력)으로 상대를 찍어 눌러 억지로 변화시키려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샤오쓰와 밍은, 모두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샤오쓰는 밍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밍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밍은 샤오쓰보다 더 강한 힘으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집착하는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밍을 위해서 강해지겠다고 결심한 샤오쓰에게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밍을 지키기 위해, 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길러온 샤오쓰의 힘은 결국 칼날이 되어 밍을 향한다. 두 인물 모두가 사랑과 폭력을 혼동하고 있는 시점에서, 파국은 예정되어 있었다. 샤오쓰는 자신이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밍 앞에 들이민 것은 폭력의 칼날이었다.
이 작품이 대만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밍의 상황은 곧 대만의 현실을 비추는 은유로 읽힌다. 밍은 주체적인 삶을 바라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기에 다른 이의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 밍을 탐하는 남자들은 현대 중국, 혹은 대만을 둘러싼 외세에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랑과 정의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그 속내에는 상대를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음습한 욕망이 감춰져 있다. 그 결과는 보호가 아니라 고립과 파괴다.
극의 종반부, 샤오쓰는 촬영장에 갔다가 감독을 만난다. 이 감독은 이전에 밍을 여배우로 한 작품을 찍고 있었는데, 밍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그녀를 찾고 있는 상태였다. 감독은 샤오쓰에게 "그 여학생의 연기가 참 자연스러워서 좋았거든. 걔 좀 찾아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때 샤오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자연스러워요? 진짜랑 가짜도 구분 못하면서, 무슨 영화를 찍어요? 지금 뭘 찍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리고 화면에는 손전등이 비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 봐온 것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으로 불을 밝힌 아주 작은 영역에 불과하다."라고. 우리가 본 것은 영화이지, 현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운운할 자격이 없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영화의 일갈은 계속된다. 샤오쓰가 밍을 칼로 찌르기 직전, 두 인물이 나눈 대화를 보자.
샤오쓰 : 누구도 널 무시 못해. 밍, 난 널 잘 알아. 널 잘 아니까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이제 네가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는 허니(밍의 전 남자친구)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 줄 알아? 그건 내가 날 허니처럼 생각해서 그래.
밍 : 내가 변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준 거였어. 참 이기적이다.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 네가 대체 뭔데...
영화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변화를 강요해서도 안된다. 영화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 질문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유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위험 요소는 이런 것이다. 작가가 세상에 널리 증명하고 싶어 하는 어떤 아이디어가 작품의 전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끔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설계할 때, 작가는 계몽주의에 빠진다. 관객을 설득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이야기 안에서 한쪽 축을 이뤄야 할 목소리가 질식할 것이다. 예술을 설교 수단으로 오용 또는 학대하다 보면 그 작가의 시나리오는 세상을 개종시키기 위해 영화로 서투르게 위장한 설교나 논문밖에는 안된다. 계몽주의란, 예술은 사회의 암을 수술해 내는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 천진한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로버트 맥키,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中)
<엘리펀트>는 컬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했던 충격적인 총기 난사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이다.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주 리틀턴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가 계획적으로 무장한 채 학교에 들어가 무차별 총격과 폭발물을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과 교직원 14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두 범인은 사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충격적인 참사는 당시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총기 규제, 학교 폭력, 따돌림, 미디어와 게임의 폭력성 등 다양한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키며 이후 미국 내 총기 난사 사건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례로 남았다.
영화는 ‘존’이라는 금발 소년이 아버지와 차를 타고 학교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운전대를 잡은 존이 아니라, 시종일관 조수석에 있는 존의 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이야기를 이끌 인물이 아니라, 곁에 앉아 있는 주변인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 — 이것이 <엘리펀트>가 택한 카메라의 방식이다.
<엘리펀트>의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일반 대중들이 사건의 주원인으로 꼽는 문제들을 근거로 삼아 관객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엘리펀트>는 그저,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사건 당시 있었던 일들을 재구성하여 보여줄 뿐이다. <엘리펀트>의 세계에서 관찰자에게는 눈만 있을 뿐, 입이 없다. 카메라는 관찰자가 사건을 목격한 '눈'만을 똑 떼어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카메라는 무력하다.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들의 역할은 관객들에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 그친다. 사건에 대해 특정한 가치 판단을 내리는 건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극의 초반, 몇몇 학생들은 동성애를 외모로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결론은 명확하다. 외모만으로는 알 수 없으며, 원인을 파악한다고 해서 현상을 제거할 수도 없다. 이 결론은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건의 범인들이 왜 이런 끔찍한 범죄를 구상했는지, 피해자들은 왜 죽었어야 했는지, 우리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 하나의 원인을 선택하여 관객에게 웅변조로 이야기하는 일은, 당장 관객의 찝찝함을 덜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관객들을 본질로부터 더 멀리 떨어뜨려 놓는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맹인이 코끼리의 코만 만지고 코끼리의 전신을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모든 게 우연으로부터 시작된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그들은 총으로 사람을 쏘는 게임을 즐겨했고, 우연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었고, 우연히 그들은 따돌림을 당했고, 우연히 나치와 관련된 영상을 보게 되었고, 피해자들은 우연히 학교에 있었고...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살벌하고도 믿기 싫은 농담 같은 비극.
결국 두 영화는 모두 사건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을 의자에 앉힌 뒤, 사건을 재구성한 영상을 보여줄 뿐이다. 이들은 진실을 단정하지도 않으며, 현실을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손전등과 카메라라는 광원을 통해, 어둠으로 둘러싸인 진실 속에 작은 빛을 비출 뿐이다. 그 빛으로 드러난 진실의 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영화는 현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두 영화의 대답은 단순하다. 다른 이가 제시한 길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 걸어본 길만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충고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나 바로 그 ‘아님’을 통해 영화는 또 다른 힘을 얻는다. 현실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지만, 관객의 내면이라는 토양에 질문의 씨앗을 심는 것 —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소이자 최대의 역할이다. 그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은 관객의 역할일테니 말이다.
이미지 출처 : TDMB, flim-grab, chat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