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소나타> 리뷰
모든 존재에 숫자와 자본의 태그가 붙여지는 시대. 무쓸모한 것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무쓸모한 것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스스로 사라지는 걸 택하거나, 어떻게든 버텨보다가 다른 존재에 의해 제거되는 것. 물론 결국 사라지게 된다는 결말은 동일하다. '무쓸모한 것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그 명제의 대우인 '살아남아있는 것들에게는 쓸모가 있다' 또한 참이라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질문하고 싶다.
예술에는 어떠한 쓸모가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라는 개념을 판단하는 척도는 곧 효율과 생산성이다. 결국, '쓸모 있음'이란 곧 ‘즉각적인 이익’이나 ‘가시적인 성과’의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예술이 우리 삶에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혹은 가시적인 성과를 창출해 낼 수 있는가? 영화를 감상하거나, 책을 읽고, 노래를 듣고 나면 당장의 기분이 바뀌기는 한다. 그런데 그 외에는? 예술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성가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고,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며, 대개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생각을 할수록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예술이 아예 무가치한 존재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있을 필요가 있나?'
<도쿄 소나타>는 예술의 쓸모, 그리고 존재의의에 대한 이 불편한 질문과 관객들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만드는 영화다. 집안의 가장 류헤이(카가와 테루유키)는 갑작스럽게 실직당하며 새로운 일을 찾아다녀야 하는 신세에 놓인다. 그러나 재취업은 쉽지 않다. 이전과 같은 직종, 지위의 일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한 번 추락한 그의 삶은 다시 도약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힘겨운 상황에 처한 건 다른 가족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내 메구미(코이즈미 쿄코)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존재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기대하며 손을 뻗지만, 그 손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 뿐이다. 큰 아들 타카시(코아나기 유)는 갑작스럽게 미군 입대 의사를 밝히고, 작은 아들 켄지(이노와키 카이)는 부모님 몰래 피아노 레슨을 받기 위해 급식비를 빼돌린다.
이처럼 <도쿄 소나타>의 세계는 말하지 못한 고민을 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한 감정들은 마음속에서 서서히 돌처럼 굳어가며, 결국 그들을 짓누르는 골칫덩이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고민이 자신의 안에서 굳어버리기 전에 밖으로 내보내야만 한다. 이렇게 '고민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타인과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인물들 간의 대화는 끝내 서로를 비껴가고, 소통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다른 어딘가로 가버리고 싶은, 지금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은 자식 세대의 욕망은 부모 세대에게 단순히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도전에 대해 부모 세대가 행한 징벌은 의도치 않게 자식 세대의 신체를 위협하게 되며, 두 세대 간의 거리를 더 벌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소통이 비껴가는 건 비단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부모 세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통도 원활하지 않다. 집안의 가장 류헤이는 자신의 권위가 추락할까 두려워 실직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백화점 청소부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내에게 들키자 도망치기에 이른다. 한편, 아내 메구미는 갑자기 침입한 강도(야쿠쇼 쿄지)에게 납치당해 인질이 된다. 이 허술한 강도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 메구미는 그와 바다로 향한다.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말하는 메구미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강도.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호칭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누가 하느님인가, 그녀 본인도 무력한 인간 한 명에 불과한데.
결국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켄지는 피아노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말한다. 메구미 또한 강도의 심정을 이해한다 말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들은 상대방과 같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그 덧없는 말은 상대의 가슴속에 닿지 못하고 허공 속에서 증발해 버린다.
결국 벼랑 끝까지 몰린 이들은, 지금의 삶을 내던지고 새로운 삶을 택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세계 최후의 부조리가 발생한다. 삶은 인간이 그토록 간절히 염원할 때는 그 곁에서 멀어져 간다. 그러나, 인간이 삶과 영영 이별하고자 거리를 벌리면 다시 인간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 힘은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마치 중력과 같은 것이다. 결국,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하던 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온다. 최후의 부조리를 자각한 이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염원을 버리고,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벼랑 끝까지 몰려있다 다시 돌아온 그들에게는 전에 없던 활기가 돋보인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항상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채, 탁 트인 공간에서 식사를 함께한다. 청소부라는 새 직업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류헤이는 이제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큰아들 타카시는 미군 입대를 유보한 채, 일본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해 보겠다는 편지를 남긴다. 내면에 생긴 돌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은, 그 돌까지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새로운 삶은, 결국 스스로의 현재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도쿄 소나타>라는 작품, 하나의 예술은 관객들의 눈앞에 불편한 현실을 들이민다. 언젠가 우리도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관객들은 덩달아 슬픔과 무력감에 젖는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 사람만이, 벼랑 끝까지 몰려 본 사람만이 다시 도약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구로사와 기요시가 표현하는 예술은 하나의 병, 바이러스다. 그 병과 끝까지 싸워, 이겨내 항체를 얻은 자만이 삶이라는 여정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자격을 얻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조리한 현상이며, 중요한 것은 오직 그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정신의 병에 탈출구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 작품은 한 인간의 사유 전체로 반사되는 이 병의 징후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정신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타자들과 대면시킨다. 정신이 여기서 길을 잃고 헤매게 하려는 것이 아 니라,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출구 없는 길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조리한 추론의 단계에서 창조는 무관심과 발견의 뒤를 따라온다. 창조는 열정이 솟아오르는 그 지점, 추론이 멈추는 지점을 나타낸다. 이 에세이에서 창조의 지위는 이렇게 정당성을 얻는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中)
영화는 켄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으로 이어진다. 감독인 구로사와 기요시는 왜 마지막에 피아노 연주를 배치했을까? 그리고 왜, 연주의 앞부분에는, 그와 큰 관계도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삶을 보여주었을까?
벗어날 수 없는 무간지옥, 누구도 나의 고통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불능의 세계.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아오던 료헤이와 메구미는 켄지의 연주에 위로를 받는다. 왜 위로받았는지, 그 이유는 그들 본인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논리가 인간의 감정과 존재를 효율의 단위로 환원할 때, 예술은 여전히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로 남아있다. 그러나 예술을 숫자의 가치로 환원할 수는 없어도,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언어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술은 흑백으로 칠해진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색감을 띄게 만드는 존재이다. 또한, 무의미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한 줌의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또한, 결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치유해 주는 존재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말한다. 예술이란 현실을 바꿀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필요하다고. 지옥 같은 현실과 대면하게 해 주고, '아름다움'이란 가치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미련한 존재이기에 사랑한다고. <도쿄 소나타>는 힘없고 무력한 예술이라는 존재에게, 구로사와 기요시가 건네는 절절한 러브레터다.
세계는 이유나 동기가 없는 무상의 것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직 예술만이 그것 역시 이유나 동기가 없는 무상의 것이므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떠한 판단으로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영겁 회귀에 의하여 세계가 스스로를 되풀이하듯 예술은 세계를 되풀이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언제나 똑같은 모래톱에서 원초의 바다는 지칠 줄 모르고 똑같은 말들을 되풀이하고, 살아 있음에 놀라는 그 똑같은 존재들을 자꾸만 되밀어 올린다. 적어도 자기 스스로 회귀하는 것에 동의하고, 또 모든 것이 회귀하는 것에 동의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메아리가, 열광적인 메아리가 되는 사람, 적어도 그는 세계의 신성(神聖)에 참여한다.
(알베르 까뮈, <반항하는 인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