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La Dolce Vita, 1960)> 리뷰
*이 글에서 다루는 영화는 1960년에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입니다. 이병헌이 출연하는 동명의 한국 영화 <달콤한 인생>과는 이름만 같을 뿐,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인생에 해답이란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권태로운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은 떠올려봤을 질문이다. 그런 우리들의 눈에 화려한 삶을 사는 스타들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달콤한 인생'은 곧 우리가 동경하게 되는 삶이 된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은, 우리가 늘 동경해온 그 무대 뒤편을 해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마르첼로는 연예인들과 유명 인사들을 따라다니는 잡지사 기자다. 그 덕에 마르첼로는 그들이 만들어 낸 로마의 화려한 무대 위에 설 기회를 얻는다. 마르첼로는 그 세계의 중심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공허를 메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한다.
처음 마르첼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종교이다. 영화는 헬리콥터를 타고 예수상을 운반하는 마르첼로 일행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육지에서 대낮부터 수영복을 입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여성들은 마르첼로를 보고, 예수상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한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마르첼로에게 그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신성한 존재인 예수는 인간에 의해 모두에게 전시되는 세속적인 대상이 되어버렸고, 육지에 있는 인간의 언어는 결코 신의 영역인 하늘에 닿지 못한다.
러닝타임이 1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갑자기 예수를 직접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두 아이가 등장한다. 그러자 언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두 아이를 보기위해 모인다. 하지만 이 두 아이를 따라가봤자 신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결코 신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해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두 아이는 "이 자리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성모님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와 갈망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받지 못한채 남겨졌다.
그러나 무의미한 것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끌어내야하고, 소유할 수 없는 것도 자신들의 품 안으로 들여야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있는 나무에 몰려든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어떤 신성한 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뭇가지를 뜯긴 나무는 더 이상 나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채 바닥에 쓰러진다. 인간은 뭔가를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지만, 어떤 존재는 소유하려고 할 수록 그 본질에서 멀어진다.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이 가까이 갈수록 연기 속에 모습을 감춰버리는 것처럼. 결국,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은 충돌하여 둘 모두가 파괴되는 결과를 낳는다.
주인공 마르첼로는 여성편력이 심한 인물이다. 그와 관계를 맺는 여성은 총 3명이다. 첫번째, 그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 엠마. 엠마는 마르첼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영화 내내 그에게 일편단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그녀의 사랑이 버겁고 답답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옥죄는 엠마의 눈을 피해 계속해서 다른 여자를 만나러 다닌다. 두번째, 상류층 파티에서 만나는 자유분방한 여성 막달레나. 그녀와의 관계는 감정 없이 육체와 욕망만으로 맺어진다. 영화의 중후반부, 막달레나와 마르첼로는 파티장에서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마르첼로는 이전보다 진지한 자세로 막달레나를 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마르첼로의 옆방에서 그에게 사랑을 속삭임과 동시에,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며 마르첼로를 기만한다.
세번째, 미국에서 찾아온 스타배우 실비아. 마르첼로는 실비아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녀를 갈구하지만, 정작 실비아는 마르첼로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그녀의 실비아의 시선 끝은 마르첼로에게 머물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에서 마르첼로와 여성 인물들 사이에 위치하는 사랑의 작대기는 단 한 번도 이어지지 못한채 어긋나기만한다. 그들은 세찬 파도가 휘몰아치는 인생이라는 바다위에 둥둥 떠나디는 섬이다. 그 섬들은 표류하고 있다. 그 사이에 다리도, 마땅한 이동수단도 없는 상태로. 이 여성들은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사랑만이 내게 구원을 줄 수 있다고. 그러나 영화는 그 말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마르첼로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인물 중 두 명 있다. 첫번째는 그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마르첼로 이상으로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이다. 오랜만에 로마를 찾은 그는 마르첼로와 함께 신나는 밤을 보낸다. 그런데,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뒤, 마르첼로는 아버지의 상태에게서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고독하게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새벽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스타이너에 이어, 마르첼로는 또 다시 명확한 이유도 알지 못한채 누군가를 떠나보냈다. 영화는 인물이 떠나가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부재의 감각, 그 허무함을 받아들이게느끼게 할 뿐이다. 남겨진 마르첼로에게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 여성 편력, 향락적인 삶, 유랑 인생. 그의 아버지는 마르첼로의 미래를 보여주는 존재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삶. 욕망만으로 채워진 공허한 삶은, 어느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붕괴하고 말 것이다.
마르첼로에게 위안이 되었던 인물 두번째는 그의 친구 스타이너이다. 스타이너는 세속적 향락에 휩쓸리지 않고, 음악, 시, 철학,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고요한 삶을 살고 있다. 마르첼로는 스타이너에게 자신의 공허함에 대해 털어놓기도 하며, 정신적으로 그에게 상당히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타이너는 마르첼로가 닮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 하나의 이상향이다. 하지만 스타이너는 갑작스럽게 그의 두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그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남겨진 인물들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뿐, 스타이너와 같은 지적인 삶도 절대적인 구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마르첼로가 바라온 삶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었다는 사실을.
어떤 것도 마르첼로의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했다. 결국 마르첼로에게 남은 것은 딱 하나, 관성이다. 그는 원래 하던 것처럼 파티에 참여하고 향락에 빠져 공허함을 잊고자 한다. 마르첼로는 여성에게 베개 속에 있던 깃털을 뿌리고, 그녀 위에 올라탄다. 밤은 깊어질수록 파티는 점점 광란에 휩싸여간다. 그러나 마르첼로의 표정은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쾌락과 말초적 흥분은 절정을 넘어서면 비애의 감정을 남긴다. 흥분은 맛보았지만, 내적인 그릇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가치는 닿기에 요원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게 된다. 향락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공하는 행복은 일시적이다. 그리고 그 일시적인 행복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공허함이 남는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욕망과 권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시계추'에 비유한 바 있다. 만약 그 시계추가 욕망 쪽으로 빠르게 움직인다면, 권태 쪽으로도 그만큼 빨리 도달할 수밖에 없다. 진동에는 일정한 속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향락적인 삶들은 이 진동 속도를 가속시키는 요소들이다. 그 화려한 삶을 통해 인간은 빠르게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아 권태로 변화한다. 권태에 도달한 시계추는 다시 욕망을 향해 움직이려 하고, 사람들은 더 강한 자극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인물들이 쌓아온 부와 육체는 무너져 내린다.
마르첼로의 직업은 기자, 언론인이다. 언론은 연예인들의 삶을 촬영해 우리가 선망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연예인들의 삶은 그들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이 투영된 이미지이자 껍데기에 불과하다. 껍데기만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존재를 손에 넣고자 한다면 그 디테일과 본질까지 감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삶의 능선만을 볼 뿐 그 삶을 좀먹는 디테일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이 타인들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그 불행한 선망이 태어난다. 그 화려한 껍데기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 삶에는 어떠한 비애도, 결핍도 없다고, 그 쾌락은 영원할 것이라고. 그 환상은 이미지를 더 화려하게 만들고, 그 이미지는 다시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와 본질을 혼동하게되고, 연예인과 일반인들 사이를 이어주는 이해의 다리는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광란의 파티가 끝나고, 마르첼로는 바닷가에 앉아 숨을 고른다. 그런 그에게 한 소녀가 다가온다. 마르첼로가 천사 같다고 해주었던 아름다운 소녀. 하지만 그 소녀의 말은 마르첼로에게 닿지 않고, 마르첼로는 소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프닝에서 보여주었던 소통의 어긋남이,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금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바닷가에서는 기괴한 형상의 가오리가 잡혀 올라온다. 이렇게 추한 존재는 명백한 형체를 가진 채로 존재하는 반면, 신과 아름다움은 형체가 없기에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 인간은 예수상, 혹은 나뭇가지처럼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물로 형체를 고정시키고자 하지만, 정작 그 사물을 탐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이렇게 아름다움이란 사라진 세계에서, '달콤한 인생'이라는 개념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 달콤한 인생은 없다.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존재냐>
알베르 까뮈 - <반항하는 인간>
쇼펜하우어 - <쇼펜하우어 인생론>
TMDB, flim-gr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