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PTA)이 구원을 다루는 방식 - 1
현대인들은 지독한 권태와 무의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 늪에서 꺼내 줄 구원자를 기다린다. 신데렐라에게 백마 탄 왕자가 찾아오듯,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꿀 존재가 나타나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 한들, 구원이 반드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노라>에서 그랬듯, 구원의 동아줄인 줄 알았던 것이 오히려 썩은 밧줄일 때도 있다. 또한 <사일런스>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처럼, 아무리 기도하고 간절히 바라도 끝내 어떤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구원은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다가서려 하면 아지랑이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렇게 불가사의하고도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구원이란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이다. PTA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결핍을 지니며, 그 빈자리를 채워줄 ‘구원의 조각’을 갈망한다. 조물주처럼 자신이 설계한 세계를 지배하는 PTA는, 이 갈망에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해 왔다. 어떤 때는 확실한 구원을 내려주고, 어떤 때는 철저히 침묵하며, 또 어떤 때는 불완전한 절충안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그의 필모그래피 초·중·후기를 대표하는 세 작품—<펀치 드렁크 러브>, <마스터>, <팬텀 스레드>—을 중심으로, PTA가 제시한 구원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더해, 가장 최근 작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통해, PTA가 다시 발걸음을 내디딘 곳은 어디인지도 알아보도록 하자.
첫 장편 영화였던 <리노의 도박사>를 제외하면, PTA의 초창기 작품들은 인간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구원에 대한 희망적인 견해를 줄곧 견지해 왔다. 그 구원은 서로의 고통과 결핍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과의 연대 형태로 이루어졌다.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에서 작중 인물들은 가족 혹은 연인의 형태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희망 혹은 가능성을 제시했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 상황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랑이 단순히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확실한' 형태의 구원을 선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한 삭막한 사무실에서 '베리'라는 남성이 혼자 전화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무실에서 나온 베리가 바깥 공기를 쐬며 잠깐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한쪽 차선에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곧이어 반대편 차선에는, 누군가 풍금을 내다 버린 뒤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떤 사고와 함께 나타난 이 풍금은, 베리의 세계에 어떤 존재가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실제로 베리는 풍금을 마주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을 구원하게 될 여성, 레나와 말이다.
베리에게 심리적으로 어떠한 결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작품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암시된다. 그는 7명이나 되는 누이들에게 시달리면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가끔 분노가 폭발해 유리창을 깨부수거나 가게의 기물을 때려 부수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인다. 그가 이런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택했던 방법은, 누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이다. 그래서 그는 의사인 형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폰섹스 여성과 이야기하며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모두 그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형부에게 털어놓은 고민은 곧 누이의 귀에 들어가고, 폰섹스 여성과의 대화는 그의 외로움을 해소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약점을 잡히는 빌미가 된다.
이렇듯 베리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와중에, 레나가 또 한 번 그를 찾아온다. 맨 처음 베리의 세계에 들어온 그녀는, 베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불청객에 불과해 보였다. 그렇기에, 처음 그녀는 점점 커져가는 베리의 불안 상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베리의 불안정한 심리를 청각화한 배경음악은 데시벨을 점점 높여 가며, 그의 불안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펼쳐진다. 베리가 레나와 데이트 약속을 잡으며, 그녀가 자신에 대해 오해했을 만한 부분을 바로잡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음악이 평온해지는 것이다. 이 순간 베리의 세계에서 레나의 지위는, 단순한 불청객에서 구원자에 가까운 인물로 변화한다.
베리는 지금껏 균열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받거나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나, 레나는 이런 베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때로는 맹목적으로도 보이는 레나의 사랑은, 그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걸 바라지도 않으며, 그의 균열까지 그대로 끌어안고자 한다. 그녀가 베리에게 바라는 것은 그의 '현존'이기에, 베리라는 존재 그대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 결핍 상태에 괴로워하던 '아담' 베리에게, 이 세계의 조물주 PTA는 '이브'에 해당하는 여성, 레나를 선물하여 그에게 구원을 내려주고자 한다.
사랑을 경험한 순간, 베리의 삶을 옥죄던 모든 결핍은 다른 얼굴로 변모한다. 그를 협박하던 폰섹스 여성과의 문제는 더 이상 그를 숨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문제를 레나 앞에 당당히 드러내며 해결할 힘을 얻는다. 레나가 베리의 내면에 들끓던 폭력성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준 덕분에, 그 폭력성이 그녀를 지키기 위한 힘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또한, 베리가 자신을 옭아매는 여러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어 모았던 푸딩 마일리지도, 이 시점에서는 그녀와 마음껏 여행을 다니기 위한 수단으로 변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펀치 드렁크 러브>는 결핍으로 출발한 한 남자가 사랑을 통해 새로운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확실한 구원의 이야기로 완성시킨다. PTA는 <펀치 드렁크 러브>의 직전 작품이었던 <매그놀리아>에서, 어떠한 비밀이든 언젠가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그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대상, 즉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필요함을 암시했다. <매그놀리아>에서 클라우디아와 짐의 관계가 그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었다면, <펀치 드렁크 러브>에 이르러 그 구원은 단순한 가능성을 넘어, 사랑이라는 가장 명확한 형태로 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