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아니라 계절을 살고 싶다

[독서] 박정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골'을 읽고

by 뚜우

부쩍 자연과 부대끼며 흙을 만지며 사는 삶을 상상해 보는 날이 늘었다. 그런 삶을 자꾸만 동경하다 보니 읽을 책을 고를 때도, 볼 영화를 결정할 때도 자꾸만 자연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다. 박정미 작가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골'도 그래서 고른 책이고, 얼마 전 이미 열 번쯤은 족히 봤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홀린 듯 다시 재생한 것도 아마도 그 때문인 듯하다.


어릴 때 눈 뜨면 앞에 산이 펼쳐진 동네에서 할아버지께서 옥상에서 직접 재배하신 제철 채소들을 먹고 자란 기억 때문인지 늘 자연에서 내가 먹을 것을 농사지으며 사는 것이 내 오랜 꿈이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살며 필요한 채소와 음식 재료들은 집 앞 대형마트에서 사 먹는 평범한 도시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정말 그 언젠가는 나도 주택에 살며 내 텃밭을 일구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굳게 믿고는 있는데 솔직히 언제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분 단위로 시간을 세며 살아왔는데 시골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없고 계절이 있었다. 시간을 셀 틈도 없이 철이 돌아왔고, 철마다 따야 할 것,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제철 채소를 먹기 위해 작물을 심고 거두기에 바빴다. (...) 시간을 살지 않으니 큼지막히 사는 느낌이 들었다."

-박정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골' 중-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새벽에 잠에 들 때까지 시간을 나누고 나눠 그때마다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하나씩 지우며 하루를 사는 나에게 '계절을 산다'는 저자의 말은 단순히 부러움을 넘어 눈물이 핑 돌게 했다. 지금처럼 1분, 10분, 1시간, 하루 단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큼지막히 계절을 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자연'스럽게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에 드는 것, 계절의 변화에 맞춰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이 아닌가.


가끔 귀촌이나 자신의 집을 지어 텃밭을 일구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다 보면 사실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모든 게 준비되었을 때 귀촌을 하거나 집을 지은 사람은 생각보다 찾아보기가 힘들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한 때를 찾기보다는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에 영감을 받아 일단 실행해보곤 한다. 나는 그들의 그런 용기가 너무나 부러운 동시에, 상상만 하며 정작 실행할 용기는 없는 내 자신이 실망스럽다. 오랜 꿈이라면서 아파트를 팔고 집을 지을 용기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접고 새로운 것을 찾아 뛰어들 용기도 아쉽지만 지금의 내게는 없다. 대책이 없으면 안 되는 나의 성격을 탓해본다.


씁쓸한 마음은 한구석에 접어두고, 지금 당장은 다소 멀게 느껴지는 꿈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내 상황에서 그 꿈에 조금이라도 닿아있을 수는 없을까 싶어 궁리를 했다. 그러자 앞 베란다에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채 흙만 덩그러니 담겨있는 기다란 화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지금 당장 내게 밭은 없지만 저 화분 하나는 있으니까 저기서부터라도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씨앗을 주문했다. 다행히 요즘 한번 키워보고 싶은 작물이 있었다. 바로 완두콩이다. 원래 완두콩은 늦겨울-이른 봄에 파종을 해서 초여름인 지금쯤 수확을 해야 하는 작물이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안되면 말고'라는 생각으로 씨앗을 주문했다. 말 그대로 대책 없는 도시농부인 셈이다. 사실 농부라고 할 수도 없긴 하지만.


다음날, 로켓배송은 내게 빠르게 씨앗을 배달해 주었다. 흙에 바로 씨앗을 심는 것보다 촉촉한 티슈나 키친타월을 이용해 뿌리를 틔운 후 흙에 심으면 싹이 더 빨리 나기 때문에 다 먹은 치킨무 용기를 깨끗이 씻어 완두콩 씨앗 6개를 넣고 아주 살짝 물에 잠기게 두었다. 3개만 심을 예정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보험 삼아 3개를 더 넣어두었다.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가 지나니 완두콩에서 삐죽 작은 뿌리가 튀어나왔다. 마침 6개의 씨앗 중 딱 3개가 먼저 뿌리를 내밀어 이것도 선착순이다하며 뿌리가 나온 세 개의 완두콩 씨앗을 미리 촉촉하게 적셔둔 화분의 흙에 고이고이 정성을 다해 심었다.


그리고 이틀, 삼일 정도가 지나자 고개를 내민 완두콩 싹. 수줍게 얼굴을 내민 연두색의 완두콩 싹들을 보니 얼굴에 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꿈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뻤다. 이 완두콩 싹들이 쑥쑥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수확한 완두콩으로 밥을 지어먹을 상상을 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시골이 한 시절의 기억이 아니라 일상으로 살고 싶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가끔 보는 특별함보다 매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니까."

-박정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골' 중-


작게나마 꿈에 닿아있게 되니 멀게만 느껴지던 꿈이 조금 더 내게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완두콩을 시작으로 하나씩 하나씩 더 작물 재배를 시도해 볼 생각이다. 그렇게 꿈에 조금씩, 조금씩 더 닿도록. 그러다 보면 지금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내 꿈이 결국은 내 일상이 되어있겠지. 쑥쑥 자라라, 완두콩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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