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지만 여행처럼

[걸어서 도서관 다녀오기]

by 뚜우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인 구립 도서관은 걸어서 3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책을 좋아해서 책과 관련된 공간, 예를 들면 서점, 도서관 등에 가는 것을 몹시 좋아하고 즐긴다. 마침 2주 전에 빌린 책의 반납일이 되어서 빌린 책도 반납하고 새로운 책도 빌려올 겸 도서관에 다녀오기로 했다.


도서관까지 가볍게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서 남편을 깨워 편하게 차를 얻어 타고 다녀올까 고민하던 중에 베란다 너머로 비치는 햇살과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오늘은 좀 걸어보는 게 어떠냐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어여쁜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는데 내가 안 넘어갈 수가 없지. 그래서 가방에 책을 넣어 들고 운동화 끈을 꽉 맨 후 집을 나섰다.



나는 한 동네에 쭉 계속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내가 모르는 길이란 잘 없는 편이다. 어딜 가도 지도 없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동네 곳곳이 내게는 익숙하기만 한데, 집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거짓말 조금 보태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울 게 없는 길이지만 오늘따라 그 길을 걷는 게 괜히 더 즐겁고 꼭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이렇게 일상도 여행처럼 생각하고 살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까?'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요즘 약간의 번아웃이 찾아왔다.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가져보려고 하루에 한 시간은 내게 쓰자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현실에 휩쓸리다 보면 악착같이 하루 한 시간을 내어 내게 쓰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밀려드는 현실에 내 시간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 사실 더 많다. 그럼에도 내 시간을 챙겨 나를 위하려면 또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어 그것도 그것대로 정말 나를 위한 일이 맞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일이 바빠 매일 일과 집, 그뿐인 시간들을 보내고 있으니 성큼 찾아온 번아웃. 나의 요즘 최대 고민이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새로운 자극을 받으며 기분을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겨우 시간을 내어 당일치기 같은 아주 짧은 여행을 다녀온다고는 해도 여행을 가서 얻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여행을 다녀와서 얻는 피곤이 뭉쳐(-) 늘 0, 제자리걸음이다. 그렇다 보니 여행도 이 번아웃을 해결할 묘수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볼 생각은 오늘에서야 처음 들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상을 여행처럼 여기고 지내볼지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도서관에 오고 가는 길부터 여행이라 생각하고 즐기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담장에 핀 빨간 장미꽃들도 눈에 더 들어오고 부모님 따라 어디론가 폴짝폴짝 뛰어가는 아이들도 눈에 들어온다. 계속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할머님 한 분이 횡단보도 앞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는데 하얀 굽의 구두에 멋진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듯 보였다. 머리도 단정하게 손질하시고 꼿꼿하지만 정돈된 자세로 서 계셨는데 그 할머님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단정하고 깔끔하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늙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관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괜히 더 열심히 걷게 되었다.



뜨거워지기 전, 봄의 마지막 햇살과 바람을 누리며 걷다 보니 목적지인 도서관에 도착했다. 곧장 빌려온 책을 데스크에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찾는 일은 꼭 보물찾기 게임 같아서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마치 병원에서 받는 처방전처럼 지금 내 상황에 꼭 들어맞거나 도움이 되는 책이 내게 찾아온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그런 책을 우연히 발견하면 꼭 보물찾기 1등 쪽지를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도 그런 책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열심히 서가를 뒤졌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런 책이 내게 와주지 않았다.



좀 아쉬워지려는 찰나, 어쩌면 내 상황에 대한 답을 내 마음이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현재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풀어갈 수 있는지도 알지만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 어쩌면 책도 이 상황에 대해 어쩔 도리가 없어 내게 나타나주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이미 내 마음이 복잡해 보고도 알아채지 못한 걸 수도 있고 말이다. 운명의 책은 만나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책은 있어서 두 권 정도 빌린 후 다시 도서관을 나섰다.



도서관에 온 길과 똑같은 돌아가는 길.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아침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점심 무렵이라 햇살이 더 강해졌다. 내리쬐는 햇볕에 표정을 구기고 싶지 않아도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계속 좋았다. 사실 도서관을 갔다 온 후에 전 날부터 계획해 둔 근교로의 당일치기 여행이 있었다.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새로운 에너지가 생길 것 같아서 계획해 둔 여행이었는데 도서관 갔다 오는 길을 여행이라 생각하고 다녀왔더니 생각보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이 쌓인 게 느껴져 먼 여행은 다녀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행대신 장을 봐서 평소에 내가 먹고 싶었던 김밥을 해서 남편과 먹었다. 집에서 만들어 집에서 먹었지만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봄바람을 느끼며 먹었더니 꼭 소풍을 온 것 같았다. 맛있는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니 그것으로 충분한 느낌.


무리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일상의 순간들을 특별하게 여기며 즐기기만 해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샘솟는다는 것을 느꼈던 하루. 어쩌면 내 번아웃에는 이게 약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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