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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일하기 (1) – 3개월 안에 조직 장악하기

낯선 땅에서, 스며들 듯 장악하다

by 츤데레달언니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한 첫날밤, 큰 이민 가방과 캐리어를 들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주재원 초기 부임은 이삿짐이 오기 전까지 석 달가량 필수품만 꾸려 생활하게 된다. 공항에 배웅 나온 남편과 딸을 뒤로하고 마치 전장에 나가는 듯한 무거운 마음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국장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이미 계획된 여정이고 잠시 떠나 있는 것임에도 눈물이 났다. 젊은 시절의 공항은 내게 늘 떠나고 보내는 장소였다. 주재 전에도 한동안 남편과 헤어지던 곳이어서, 내게 눈물과 공항은 늘 한 세트였다.


파리 시내 호텔로 가는 길, 택시 창 너머로 바라보던 파리의 하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둑한 밤, 구름이 잔뜩 낀 을씨년스러운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낯설 법도 했지만, 의외로 나는 푸근하고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첫날의 푸근함은 내게 프랑스 생활이 낯설지 않게 해 주었다.


나는 프랑스의 가전 품목 영업 주재원이었다. 담당 제품의 현지 판매를 위해 프랑스 법인의 판매·마케팅 조직을 지원하고, 동시에 본사의 여러 자원을 조율해 오는 역할이었다. 프랑스 법인에서 나는 품목 대표성을 갖고 있으며, 때로는 본사의 지원 없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려 현지 오퍼레이션을 진행해야 하기도 했다. 무한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주재 발령 소식을 들었을 때 선배들은 여러 조언을 해주셨다. 법인장님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자신이 맡은 품목에 오너십을 가질 것, 주재원이 없어도 조직이 자생할 수 있도록 만들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지 조직을 3개월 안에 장악할 것. 그러나 이 '장악'이라는 말은 단순히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현지 조직과 얼마나 신속하게 소프트 랜딩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어떤 리더십을 갖춰야 하는가를 3개월 내에 완성하라는 뜻이었다.


주재원은 현지인들에게 본사에서 파견된 브리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본사의 전략을 로컬 법인에 주요하게 포지셔닝하고, 그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며 비즈니스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주재원은 주요 의사결정의 어드바이저 역할을 맡는다. 나는 처음부터 복장에 신경을 썼다. 패션과 명품의 왕국인 프랑스에서, 그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첫 시도로 명품 브랜드의 가방과 시계를 착용하고 멋진 비즈니스 복장으로 출근했다. 본사에서 파견된 주재원이니만큼 처음엔 내 존재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을 장악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매일 본사 담당자들과 통화하며 현지인들의 이슈를 해결하려 애썼다. 사실은 애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닦달을 했다. 당시 나의 통화는 대부분 큰 소리로 진행됐고, 그 목소리에 놀란 프랑스 직원들이 슬쩍 나를 피하기도 했다. 한 번은 전화를 끊고 난 후,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세게 쳤다가 실제로 부순 적도 있었다. 담당자들 중 몇몇은 내가 너무 몰아세워서 통화 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했다. 지금도 그 시절 가장 닦달을 많이 당했던 내 친한 여자 후배와는 가끔 만나 함께 웃곤 한다. 본사에서는 나를 '마녀'라고 불렀다는데, 그 시절엔 본사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주재원이야말로 현지에서 가장 큰 차별화 포인트라고 믿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 도착하고 얼마간, 현지 조직원들에게, 거래선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많았다. 나는 프랑스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한국 교민 지인에게 부탁해 프랑스어로 소개 문장을 다듬은 뒤, 그 문장을 외워 그대로 말했다. 기억나는 문장은 이랬다. "Bonjour, je m'appelle ooo, Je travaille chez les produits blancs pour ~~" 억양도 어설프고 발음도 부족했지만, 그들의 언어로 인사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환영의 분위기를 기꺼이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주 3회 한 시간 일찍 출근해 다른 주재원들과 함께 회화 과외를 받았고, 프랑스 역사책을 두세 권 읽었으며, 주말이면 유적지와 시장을 다니며 정보를 익히기 바빴다. 현지인과의 대화에선 무조건 프랑스어 단어 몇 마디라도 시도했고, 역사 속 인물에 대해 아는 척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 파리 도시에 대한 감흥을 나누다 보면 현지인들은 내 말에 귀 기울였고, 때로는 프랑스 역사를 아는 내 모습에 감탄하기도 했다. 사실 깊은 역사 지식은 아니었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책 '베르사유의 장미'와 영화 '레미제라블'의 짜깁기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내 관심과 노력을 고마워했다. 실제로 나 역시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회사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조직을 정비했다. 당시 리더는 보수적인 스타일이었고, 나는 도전적인 리더로 교체해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넣고 싶었다. 그것이 변화하는 시장에 빠르게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내부 스테이크 홀더들과 수차례 논의 끝에 새로운 리더를 채용했다. 보는 눈이 있었다. 리옹 출신으로 귀족 가문 출신의 젊은 프랑스 리더는 내 주재 기간 내내 훌륭한 파트너였다. 우리는 둘 다 도전적이고 겁이 없었기에 함께 많은 성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젊은 리더가 주는 파장은 컸다. 리더가 바뀌자 구성원들도 코드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고, 조직은 활기차고 강해졌다. 본사에는 대 프랑스 법인으로, 시장에서는 톱티어 브랜드로 빠르게 성장했다.


나는 3개월 안에 조직에 스며들었다. 의사결정의 강력한 오피니언 리더이자, 현지인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해결사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현지인들과의 끈끈한 협력은 지금 생각해도 나의 큰 행운이었다. 조직을 '장악'했다기보다, 한국에서 온 기러기 여자 주재원의 고군분투를 포용해 준 프랑스 현지인들의 똘레랑스(tolérance), 즉 다름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 덕분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프랑스 주재생활의 첫 단추를 잘 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 『프랑스에서 일하기 (2) – 리더는 혼자 일하지 않는다』에서는 내게 큰 전환점이 되어준 한 젊은 프랑스 리더와의 협업 이야기, 그리고 진짜 변화가 시작된 그날들을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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