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Française 그녀와 함께 일하다
프랑스에서 ‘진짜 일’이 시작된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이름은, 실벳.
우리 법인의 또 다른 독한 마녀였다. 제품 마케팅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그녀는 빛나는 눈을 가진 단아한 체구의 프랑스 여인이었다. 하지만 외모와 달리, 원칙을 고수하며 집요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실력자였다.
이 마녀는 내가 오기도 전부터 본사 담당자들을 닦달하며 요청한 메일에 반드시 회신을 받아내고야 마는 법인의 능력자로 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 본사의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전담하고 있었고, 나의 전임 선배 주재원은 모든 본사 소통을 그녀에게 전적으로 일임해 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현지 조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오고 나서 본사의 커뮤니케이션이 나를 중심으로 소통되자 그녀는 초반에 내심 불편해했던 것 같다. 나는 주재원 부임 초기에는 모든 업무를 디테일하게 챙겼고 부수적인 일들을 현지 직원들에게 업무 얼로케이션 (allocation ) 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일하였다. 그래야 조직을 빨리 장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실벳은 내게 본사의 회신이 없는 산더미 같은 이슈들을 가지고 왔다. 여기에서 잠시 내가 겪은 프랑스인 들의 단면을 보면,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메일을 오래 보관한다. 당시 아웃룩으로 메일로 소통할 때에도 현지인들은 대게 5년 정도 되는 메일을 보관하면서 본사 담당자가 변경되어도 스토리를 완벽하게 구성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그들의 명분을 지지하는 방어 기재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인들은 명분이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처음에는 나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나? 의심도 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그녀는 그간 해묵은 이슈들을 나를 통해 깔끔히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씩씩하게, 하나씩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의 본사 후배들은 야근을 마다하지 않으며 우리를 도와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실벳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부서가 우리 사업의 핵심적인 전략 부서임을 강조했다. 영업은 가격 협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된 제품 지식으로 유통과 소비자 가치를 올리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라며 모든 전략의 시작점이 실벳이 담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본사 담당자들, 그 위의 부서장들 각각의 업무 스타일, 개성과 취향 등도 말해주면서, 그들과 소통하는 기법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자 실벳도 법인의 현지인들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업무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해 주며, 우리는 여자들의 수다를 떨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실벳과 나는 절친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텐션이 있었다. 어떤 결정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 대립도 있었고, 설득하는 과정도 있었지만 내내 그런 논쟁을 즐기는 사이가 될 정도로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나는 주재원 업무가 손에 익을 즈음, 대부분의 제품 마케팅 관련 업무는 실벳에 일임했고 그녀를 중심으로 본사와 소통이 되게 했으며, 그중 안 풀리는 문제에 대해서만 내가 직접 관여하여 해결사 역할 정도를 했던 것 같다. 뿐 아니라 내부 회의에서 영업과 논쟁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실벳의 의견을 지지하면서 제품의 차별화와 가치가 지속되도록 돕기도 했다.
실벳은 제품 마케팅 조직에 새로운 인력들을 보강하면서 최강의 조직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녀 아래에는 귀족 가문의 여식이며 3개 국어를 하는 엘레노아, 파란 눈의 듣고만 있어도 황홀한 프랑스어 발음의 엘렌, 본사 담당자들에게 인기 많았던 베트남계 혼혈미인 나탈리아, 그리고 K-문화에 흠뻑 빠진 정통 프랑스 미남 맥심이 있었다. 이들은 실벳의 조련 덕에 최선 그 이상의 몰입으로 맡은 품목에서 최고의 마케팅 전략을 만들어냈고 직접 유통에 제품 소개를 해가며 프랑스 가전 비즈니스 성장의 주축들로 성장해 갔다. 나와는 매주 유통을 함께 돌아다니며 우리 제품의 전시상태, 가격포지셔닝을 조사하고 경쟁사 트렌드를 분석하여 실시간으로 영업에 피드백하며 유통별 Quick Fix 할 수 있게 하였다. 본사 담당자가 출장올 때면 반드시 식사 자리를 주선해 그들끼리 소통의 길을 터주는 일도 했다.
실은, 나는 그들에게 늘 큰 목표를 주었다. 그리고 많은 챌린지를 던졌다.
반드시 현지에 맞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도록 했고, 제품 가치에 걸맞은 가격 포지셔닝도 제시하도록 했으며, 동시에 현지 영업에는 과감한 목표를 부여하도록 했다. 그 목표는 내부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각 부서의 실행 아이템으로 명료하게 정리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실벳팀은 우리 사업의 시작점이자 Think Tank였으니까.
우리 법인은 이후 4년간 최고의 성과를 내었다. 실벳도 디렉터로 승진하였고 내가 없어도 조직이 돌아갈 수 있는 구심점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다 나의 마지막 주재 해, 유럽에 불경기가 닥쳤던 2015년, 전 사업 분야의 구조조정이 있던 시점과 맞물려 실벳은 자회사에서 더 큰 규모의 팀을 맡아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녀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더 나은 길이라 판단을 내렸지만 가슴 아픈 이별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본사 귀임을 앞두고, 실벳은 프랑스 여인 아마조네스 모임을 만들어 나의 송별회를 해주었다.
파리의 성수동 같은 마레 지구의 트렌디한 바에서 와인을 마시며 밤늦도록...
지금은 그녀를 가끔 SNS로 보게 되지만, 재작년 파리 여행에서 못 만나고 왔더니 섭섭해했다고 전해 들었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