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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일하기 (4) – 유통에는 문화가 있었다

똘레랑스 파트너십에서도, 기회는 몸으로 부딪치는 실행력으로 열렸다

by 츤데레달언니

어느 나라던 물건을 파는 유통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보인다. 프랑스는 전국 단위의 대형 유통망과 함께, 수많은 지역 기반 유통이 공존하는 분산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리 중심의 강력한 중앙 행정의 체제임에도 국경을 맞닿은 동쪽 지방 알자스-로렌, 서쪽 브르타뉴, 북부 노르망디, 남부 지방 프로방스 등 프랑스 각 지역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다른 국가의 통치를 받거나 독립적인 정체성을 유지해 왔고, 이로 인해 지역 중심의 생활경제와 상권이 강하게 뿌리내렸다. 유통 또한 이러한 지역적 자율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해 형성된 것이다.


실제로 내가 프랑스에 근무하던 시절, 가전 유통 시장은 블랑제(Boulanger)와 다티(Darty) 같은 전국구 전자 유통이 25% 수준, 까르푸(Carrefour)나 오샹(Auchan)과 같은 하이퍼마켓이 10%, 그리고 나머지는 지방 유통사들이 나눠 갖는 형태였다. 한눈에 봐도 시장이 편중되지 않은 구조였고, 이 덕분에 특정 유통의 위기나 변화가 전체 영업에 치명적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편으로는 손이 많이 가는 사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층적 유통망 덕에 더 안정적인 영업 운영이 가능했다. 물론 최근 10년 동안 프랑스 유통들도 합종연횡을 통하여 불경기를 타개하는 생존책을 마련하였다고 전해 들었더. 또한 코로나 시절에 급격하게 일어난 이커머스 역시 전통 유통 입장에선 큰 도전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유통 구조가 특히 흥미로웠던 이유는 단순한 상업적 논리를 넘어선 프랑스만의 어떤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가 중시하는 ‘만민 평등’과 ‘공존의 질서’는 유통의 작동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프랑스 바이어들은 특정 공급업체에 일방적으로 쏠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동일한 사업군에서도 A 브랜드는 냉장고, 브랜드 B는 세탁기로 주 공급업체 선정을 하면서 동시에 가격대별로도 여러 브랜드가 배치되는 식으로 묘한 균형 감각 속에서 다양한 공급사와의 협업을 운영했다.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 유통과 상담하다 보면 바이어에게 저글링 당하는 느낌도 있었다.


우리는 모든 제품군에서 1위를 차지하고 싶었고 그들과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통한 “동반 성장” 의 구호를 외치고 싶었지만 - 인근나라인 영국처럼 말이다 - 그들과의 파트너십은 늘 "너에게도 기회가 있고, 다른 이에게도 기회가 있다 “ 라며 치열한 절충과 협의의 연속이었다. 누군가는 매력적인 당근이 부족했던 게 아니냐고 묻겠지만 프랑스 유통은 당장의 미끼보다 신뢰를 기반으로 천천히 다 같이 가는 파트너십을 선호했다. 물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편중도 이슈를 미리 예측하고 여러 대안을 마련해 두는 그들만의 전략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 바이어들은 미래의 리스크에 대해 과도하게 우려하고, 선제적으로 대비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런 지나친 신중함은 때때로 조심스럽고 느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까지 포함한 프랑스 유통의 방식은, 결국 관계의 지속 가능성과 균형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안에는 프랑스식 ‘똘레랑스(Tolérance)’—관용과 공존의 원칙—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매년 초 진행되는 ‘리스팅(Listing)’ 제도는 이러한 질서를 공식화한 절차였다. 유통사는 매년 1분기마다 판매할 모델 리스트를 재정비하고, 브랜드별·라인업별로 균형 잡힌 구성을 고심하며 진입 제품과 매장 수를 결정했다. 이 시기는 공급업체에게는 1년 실적을 좌우하는 생존의 문턱이었고, 우리 팀도 이 시기를 맞아 수도 없이 미팅을 요청하고 제안서를 내며 프랑스식 '문 두드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바이어들과의 상담에서 늘 당황스러웠던 점 하나는, 약속 시간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파리 도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교통 체증이 심했고, 법인 헤드조차 오토바이나 스쿠터를 타고 출퇴근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10~20분 늦는 건 당연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나는 본사 리더십의 출장 미팅을 준비할 때마다 현지 파트너에게 “이번만은 제발 정시에 와달라”라고 여러 번 강조해야 했다. 결국 나도 매번 30분 이상 일찍 출발하는 습관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프랑스의 전국 유통 중 한 곳이 오랜 정체를 벗어나기 위해 새 CEO를 영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성향은 ‘혁신적’이라 알려졌지만, 프랑스 유통의 중간 관리자들은 "정통 프랑스 스타일" 그 자체였다. 바이어들은 여전히 아날로그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고, 혁신이 실행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시기, 우리 역시 해당 유통에 신규 제품 진입을 시도하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사업은 쉽지 않았다. 본사의 큰 투자를 받았지만 신제품 판매는 평타였고, 유럽 경기마저 하락세였다.” 매출 목표를 놓고 프랑스 헤드와 언성을 높이던 날들이 지속되었는데, 나는 사무실이 견딜 수 없었고 시장 돌아가는 사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지방 매장 출장을 자처했다. 본사 담당자도 함께였다. 그렇게 도착한 리옹의 한 매장에서 우리는 관행대로 진열 상태와 경쟁사 가격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멀리서 중년 프랑스인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중 한 명, 인터넷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 그는 바로 새로 부임한 CEO였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용기가 나를 밀어 올렸다. “갑자기 그런 용기가 날 수가 있었을까? 나는 무턱대고 그에게 가서 무작정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 우리 회사는 어떤 브랜드인지, 지금 어떤 신제품으로 진입하고 싶은지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곧바로 Top-to-Top 미팅을 제안했다.

그 만남은 한 달 뒤, 본사 경영진과 그 유통사의 CEO 간 미팅으로 이어졌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는 신규 제품 진입을 확정받았고, 공동 마케팅 투자까지 성사되었다. “정체된 비즈니스의 순간에 새로운 빛이 들어온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의 절박함과 무작정 들이댔던 용기, 그 열정이 어쩌면 그 CEO에게 전달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후 나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독일 쇼장에서 열린 신제품 행사 때는 직접 그의 자가용 비행기에 나와 에르베를 태워 상담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프랑스 유통이라는 느리고 보수적인 구조 속에서도, 때로는 단 하나의 타이밍과 관계가 모든 것을 바꾸는 법이다.


그 나라의 시장을 이해하려면 유통 구조를, 유통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 현지 유통망의 구조는 주어진 현실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하며, 그 안에서 상관습에 맞는 방식으로 효율을 끌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책상 뒤에 머무는 전략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용기와 실행력이다. 현지인 뒤에만 머물지 않고,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담대한 리더십이야말로 진짜 성과를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나는 프랑스 유통의 한복판에서 배웠다.


다음 편에서는, 프랑스 문화와 감성을 담아낸 현지 마케팅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프랑스에서 일하기 (5) – 마케팅에 문화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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