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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일하기 (6) – 성공과 실패 사이

불경기 속 링 위에 선 리더십

by 츤데레달언니

2015년 그 해는 마치 수많은 관중들의 야유 속에 링 위에서 홀로 싸우는 권투 선수처럼 힘겨웠던 해이다. EU 연합 이래 최대 위기가 온 듯, 2015년 그리스가 국제 채무를 갚지 못하여 디폴트 상태에 들어섰고, 이탈리아 역시 부채 위기로 흔들리던 시기였다. 유로존 전체가 침체 분위기에 휩싸였고, 유로화 가치는 하락하며 유럽 시장 전반에 불경기의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었다. 그 여파로 각 국의 판매 법인들도 판매가 정체 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내가 부임한 이후 승승장구했었던 사업 역시 점차 영향을 받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동시에 본사에서는 새로운 경영진이 선임되었고, 조직 전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불경기를 타개할 수 있는 판매 전략이 시급해졌고, 본사에서는 수익성 개선을 위한 여러 대책 시나리오를 수립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경기 하락 속도를 반영해, 시나리오 1, 2, 3으로 구체화된 대응 안이 만들어졌고, 각 법인들도 이에 발맞춰 분주히 움직이던 시기였다.


3월, 본사의 새로운 팀장 주재로 화상회의가 생겼다. 법인 헤드, 마케팅 담당 등과 주재원인 내가 회의에 참석하여 실적 하락을 설명하고, 미흡했던 부분을 반성하고 다음 달 영업 전략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갑작스레 수익성 하락에 대한 팀장의 질책이 시작되었다. 사업의 수익성은 단지 판매만 책임지는 문제는 아니었기에, 법인 헤드는 영업단에서 최대한 가격을 올려 받고 마진을 확대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거듭 설명하였으며 본사의 원가가 높은 것도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것을 변명이라고 생각했던 팀장은 언성이 높아지며 로컬 조직의 절실함 (Desperation) 이 없는 것에 대하여 불같이 화를 내셨다.


결국 듣다 못한 법인 헤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그 순간, 나는 아찔했다. 프랑스인인 헤드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만일 헤드가 뛰쳐나간다면, 이후의 파장에 대한 장면들이 떠올라 헤드의 손을 잡으며 다급하지만 작게 "에르베, 지금은 아니야, 조금만 참아,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 만들게" 이야기하며 진정시켰다. 질책성의 회의가 끝나고 나는 망연자실하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정신을 추스르며 다시 현지 조직에게 상황을 설명하곤, 그날 패잔병같이 퇴근했었다.


이미 본사에서는 그 화상회의가 빠르게 회자되고 있었다. 그간 승승장구하던 대형 판매 법인이, 새로 부임한 팀장의 거센 질책 앞에 무너지는 장면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새로운 팀장의 강한 본사 주도형 리더십에 대한 경외감, 그러나 그 속에는 일방적인 몰아붙임이 있었고, 그것은 현지인들에게는 인간적인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실적은 계속 하락 추세였고, 나 역시 본사와 법인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 속에 외줄을 타는 심정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일단은 에르베와 함께 거품을 걷어낸 현실적인 2분기 판매 예측을 세우며, 현재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도저히 계획 달성은 요원했고, 플랜 B 달성조차도 쉽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곧바로 본사로 출장을 떠났고, 담당자들과 함께 새로운 컨틴전시 플랜을 마련하며 대책을 세워 경영진에게 직접 보고했다. 본사 팀과 며칠 밤을 새우며 준비한 촘촘한 계획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현지에서 직접 날아와 사안의 긴급성을 공유하고, 실행력을 다지려는 팀의 절박함(Desperation)이 전해졌기 때문이었을까. 경영진은 예상과 달리 질책보다 격려를 보내주었고, 실적 회복에 대한 기대를 덧붙였다.


이후 나는 후배 주재원들에게 이 시기를 회고하며 종종 이렇게 조언하곤 한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

특히 판매를 책임지는 부서는 어려운 시기일수록 한발 먼저 나서야 한다. 주변 부서의 챌린지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주도적으로 입장을 제시하고 전략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이후, 우리는 '한 대라도 더 판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매출은 더 하락했고, 그 바닥 아래에 또 다른 지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위기의 한가운데서, 나와 프랑스 팀은 오히려 국가대표급의 팀워크로 단단히 뭉치게 되었다.


에르베, 실벳, 이사벨, 매튜—프랑스 팀의 동료들은 퇴근 전마다 내 책상에 각자의 그날을 간단히 업데이트를 하였으며, 마지막엔 늘 도와줄 일 없냐고 묻곤 조용히 사라졌지만, 나는 느꼈다. 링 위에서 두들겨 맞고 있던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그 자리에 말없이 나를 응원하던 관중들이 있었다는 것을.


불경기가 도래하고 시황이 어려울 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제품, 가격, 마케팅 전략으로 매출을 성장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출과 수익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영업은 대개 가격을 낮추거나 프로모션을 확대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손익 악화는 결국 구조 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인력 감축과 비용 효율화로 이어진다. 조직은 점차 경직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시행되기 어려워진다.


이때 리더십이 어떤 중심을 잡느냐가 결정적이다. 만약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조직의 지속성, 브랜드 위상의 견고함, 소비자의 만족이라는 세 가지를 전략의 최우선 기반으로 두고 가장 집중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조직을 떠난 이후에도 지속 가능한 경영의 핵심 축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내가 했던 최고의 성과는, 로컬 조직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고, 가격 포지셔닝을 지키기 위해 타이트한 마진 관리를 했던 것이다. 2015년 마감 시점에 우리는 시장 수요가 역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역성장을 피했고, 본사에서는 여전히 유럽 1위 법인의 위상을 유지했다. 시장에서도 주요 제품의 점유율 1위를 지켰다. 무엇보다 나는 후임 주재원에게 유럽 최고의 판매 조직을 넘겨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프랑스에서의 성공과 실패 사이에는 언제나 현지 동료들이 함께 있었다. 당시에 현지에 출시된 혁신적인 제품들이 우리를 가슴 뛰게 했던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현지에 적합한 마케팅과 영업 전략을 함께 고민해 준 리더십, 그리고 그 뒤에서 백조의 발처럼 치열하게 움직였던 실행 조직의 힘이었다. 성공의 순간에도, 실패를 이겨내던 순간에도 그들은 언제나 빛나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더욱 깊이 느낀다.


그리고… 프랑스를 떠나기 전의 며칠.

그 이야기, 다음 편에 계속.


다음 편 : ‘프랑스에서 일하기 (7) – 마지막 날들, 내 마음이 남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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