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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일하기 (7) – 마지막 날들

내 마음이 남은 곳, 파리 15구

by 츤데레달언니

나는 파리 15구에 살았다. 파리는 중심부의 1구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달팽이 모양을 그리며 20구까지 행정구역이 나뉜다. 우리나라처럼 ‘○○구’라는 이름 대신, 숫자로 구역을 나열하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광지를 중심으로 보면,
1구에는 루브르 박물관과 콩코르드 광장이,
3구에는 구시가지인 마레지구가,
4구에는 시떼 섬과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그 아래 5구엔 소르본 대학교와 라탱지구,
7구엔 에펠탑과 샹 드 마르스 공원이 펼쳐지고,
8구엔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이 이어진다.

그리고 북쪽 끝 18구에는 몽마르트르 언덕과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있다

내가 살았던 15구는 센강 아래 왼편,

에펠탑에서 지하철로 2~3 정거장 떨어진 조용한 주거 지역이었다.

서울로 치자면, 한강 남쪽의 목동쯤 되는 느낌이랄까.


파리 중심부가 방사형으로 기획된 도시라면,
15구는 그 바깥쪽에 위치한 조용한 신주거지다.

프론 드 센(Front de Seine) 주변엔 유리창이 번쩍이는 주상복합 고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그 옆엔 1970~80년대에 지어진 기능적인 아파트들,
그리고 그 사이엔 1800년대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묵묵히 나란히 서 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재건축 들어가면 좋겠다’ 싶은 건물도 있지만,
그 옆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묘하게 어울려
낯설면서도 정겨운, 그 동네만의 풍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우리 집 앞은 센강을 바라보는, 20여 가구가 사는 5층짜리 빌라였다.
작은 광장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이 늘 떼를 지어 앉아 있었고,
그 너머에 바로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가 놓여 있었다.

우리에게는 시 한 구절로 더 익숙한 그 다리.

“나는 미라보 다리 아래에서 그녀를 보았네…”

막상 마주한 미라보 다리는 100미터 남짓.
왕복 4차선 도로 옆에 좁은 인도가 하나 붙은 소박한 다리였다.
휙—걸어서 지나가 버릴 수 있을 만큼 작고 단단한 모습.

참고로 파리 시내 센강 위에는 총 37개의 다리가 있다.

대부분 길이 100~200미터쯤으로, 한강 다리에 비하면 아담하지만,

그 다리들은 오랜 역사의 현장을 지나
오늘도 파리지앵과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다.


우리 집 앞 미라보 다리 역시 첫인상은 이랬다.
“에이, 이게 그 미라보 다리야?”

기대보다 훨씬 소박했지만,
나는 아마도 그 시 속의 다리에서
사랑이 넘쳐흐르고,
은하수를 건너는 듯한 몽환적인 장면을 떠올렸던 것 같다.

대개 파리는 그렇다.
우리가 파리를 좋아하게 되는 건,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담긴 무언가로부터
먼저 정서적인 유대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장소를 마주하는 순간—
그 감정은 폭발하듯 깊어진다.

상상 속의 그곳이 현실과 다를지라도,
파리의 그 장소는
이상하게도 나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그게 바로 파리의 매력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에는 자벨(Javel)이라는 지하철 역이 있다.
그 역에서 20미터쯤 내려가면, 우리 집이 나온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프랑스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동네 빵집 (boulangerie 불랑즈리)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 그 빵집 앞 스탠딩 테이블에서 쇼케 (chouquette 슈케)—속이 비어 있는 동그란 빵—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곁들이는 것이 나의 주말 루틴이었다.

손녀를 보러 매년 석 달씩 파리에 머무르시던 친정 부모님은

그 집 부부와 눈짓과 몸짓, 몇 마디 영어 단어만으로도 따뜻한 교감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만큼 그 프랑스 부부는 정이 많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나의 ‘빵집 원픽’은 따로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집에서 한 정거장쯤 남쪽 길가에 있던 바게트 전문점.

프랑스에서는 매년 바게트 경연대회 (Grand Prix de la Baguette)가 열릴 정도로,
바게트에 진심인데 그 집은 바로 그런 장인(boulanger)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아침 9시쯤이면 늘 오픈 런이 벌어지는 인기 빵집.
나도 주말이면 그 줄에 기꺼이 섰고,
기다리며 프랑스 사람들의 담소를 힐끗힐끗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집 바게트는 꼭 서너 개는 사야 한다.
집에 오며 갓 구운 바게트를 뜯다가
한두 개쯤은 어느새 다 먹어버리고 말거든.


그 바게트 빵집이 있는 블록이 끝나는 동쪽 귀퉁이엔 과일가게가 하나 있다.
토요일 오후 4시까지만 문을 여는 작은 과일·채소 가게인데, 늘 문전성시다.

“맛있는 체리 있어요! 오늘은 싸게 드립니다~”

주인장의 프랑스어는 마치 멜로디처럼 흘러나왔고,
나는 그 소리에 발길을 멈추곤 했다.

그 가게에서 나는 사과, 체리, 복숭아(특히 납작 복숭아인 pêche plate), 딸기, 토마토, 콜리플라워, 아티초크 같은 제철 과일과 채소를 일주일치 한가득 담아왔다.

내 틸롤리 장바구니(trolley bag) – 바닥에 바퀴가 있는 장바구니- 의 바닥은 금세 묵직해졌다.
프랑스는 낙농국이라 그런지, 과일도 늘 신선했고 그 당시엔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한국 식료품점에 들러 불고기 거리—프랑스 정육점에서는 설명이 여간 까다롭지 않은—를 사고,
한국 야채 몇 가지를 챙긴다.

그 옆 까르푸(Carrefour)에 들러 우유, 치즈,

그리고 10유로 정도 하는 데일리 와인 한 병을 장바구니에 더하면 주말 장보기가 완성된다.

어느새 내 틸롤리는 20kg쯤 되어 있고,

나는 그걸 끌고 2~3km 정도를 천천히 걸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돈다.

유모차를 끌고 장 보는 엄마들, 아이들과 장난치며 걷는 아빠들,
장을 보러 나와서도 멋지게 차려입은 할머니들,
빵집 앞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넘기며 커피를 마시는 동네 할아버지들.

날이 좋아도, 흐려도.

그렇게 여유로웠던 주말 아침의 풍경은

내가 살던 15구 동네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한 조각 같았다.


나는 귀국 시점이 되어서야,
그 동네의 그 풍경이 눈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나서야, 비로소 그립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손녀 뒷바라지 겸해 매년 석 달씩 함께 살았던 친정 부모님이
재작년 다시 파리 여행을 가셨을 때도,
내가 살았던 15구에 일부러 숙소를 잡으셨을까.

예전 그 빵집, 과일가게, 한국 식료품점을 다시 찾아가시고
심지어 빵집 부부와는 오랜 인연처럼 따뜻한 인사를 나누셨다고 했다.


그 풍경, 그 일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 가족의 기억 속에도, 오래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번 연재는

〈프랑스에서 일하기 (8) –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간 곳들〉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 내가 마지막으로 다시 찾아갔던 장소들.
그 며칠의 조용한 발걸음을 따라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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