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파리 지도
사람마다 마음속에 품은 파리의 풍경은 다른 모양이다 내겐 같은 관광지나 명소일지라도 다른 감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에게 파리는, 몽마르트르 언덕과 바스티유 광장, 오르세 미술관과 에펠탑처럼 어떤 감정과 연결된 장면들로 기억된다.
몽마르트르 언덕- 그위에서 다시 만난 그림들
출장자, 친구, 가족이 파리에 오면 어김없이 찾았던 그곳—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re) 위, 하얀 대리석이 우아하게 빛나는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 그런데 실은, 그 언덕을 오르며 만나는 길거리 화가들의 자판이 나에겐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조용히 캔버스를 펴고, 초상화와 캐리커처, 몽마르트르 풍경화들을 선보인다. 대부분은 에펠탑과 센강, 파리의 주요 관광지를 담은 그림이지만 가끔씩 눈에 띄는 그림들이 있었다. 조금은 거칠지만, 진득한 유화로 표현된 파리지앵의 뒷모습, 돌바닥 골목에 드리운 그림자, 센강을 내려다보는 익명의 사람들. 그런 그림들이 내게는 파리의 흔적이었다, 나의 눈 속에, 기억 속에 꾹꾹 눌러 담고 싶었던 듯 나는 그 언덕에 천천히 다시 오르게 되었다.
생제르맹 거리,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 – 예술을 논하며
생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는 파리 6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소르본 대학 쪽으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곳에 다다른다.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 —1887년 문을 연 이곳은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문학적 성지였다. 나는 그곳 구석진 자리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굵은 안경 너머로 신문을 읽는 노신사, 노트북을 두드리는 파리지엔느, 그 틈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우아한 중년 여성들. 잠깐, 마치 뒤마와 르누아르가 테이블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백열등 불빛, 커피 향… 나는 그 기억을 내 마음 앨범에 조용히 끼워 넣었다.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 잊을 수 없는 날
나는 이 광장에 서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나오는 횃불 든 여인이 늘 떠올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이었던 감옥은 사라지고, 자유의 여신상을 본뜬 7월 기념비(Colonne de Juillet)가 그 광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 그 연말의 파리는 11월 아랍권 극단주위자 들리 클럽, 카페등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일으키며 젊은이 100명이 죽거나 부상했고 파리는 곧 깊고 긴 추도의 침묵에 휩싸였다. 바스티유 광장에는 촛불과 희생자들의 사진, 국화꽃이 놓인 낮은 울타리가 세워졌다. 조용히 곡하는 시민들의 무수한 눈물과 함께. 그다음 날 우리 사무실과 파리 곳곳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현지 동료들과 지인들의 안전을 확인하며 조용한 비탄 속에 하루를 보냈다. 우리에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동료들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었다.
내가 파리 주재하던 5년 중 가장 슬펐던 순간은 그해 초에 있었던 세월호가 침몰해 가는 순간을 TV로 보게 되었던 때와 파리의 테러가 밤새 있었던 그다음 날이었던 것 같다. 아무 죄가 없는 젊은 청춘들, 윗 세대의 이기심으로 많은 어린 생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지금도 바스티유 광장을 떠올리면, 그저 많은 죽음이 생각나는 그런 우울한 곳이다. 파리를 떠나기 전 다시 찾은 바스티유 광장의 추모의 상징들 앞에서 나는 묵념을 하였다.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인상파의 고향
떠나기 전 미술관들을 되짚어보는 일은, 파리에 살았던 내게도 설레는 일이었다. 이곳에 산다고 하면 다들 루브르, 오르세이, 퐁피두 센터—이른바 '파리 예술 3종 세트'는 섭렵했냐고 묻곤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을 가장 좋아했다.
오르세이에 전시된 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그 자체가 '프랑스'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후기 인상파인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오르세이에 걸린 자화상과 그의 생애 마지막 두 달을 보냈던 파리 인근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sur-Oise)의 풍경화들은 내게는'프랑스 화가'처럼 느껴졌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드가의 무용수 시리즈처럼 오르세이에서 마주한 인상파의 걸작들은 물론, 다른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까지도 함께 떠을리게 된다. 이들의 그림은 스프링 노트 겉장에도, 엽서에도, 냉장고 자석에도 익숙하게 붙어 있지만 '진짜'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동이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나의 옆에, 화가가 함께 서 있는 듯한 기분. 혹은, 그림 속 어딘가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한 환각. 그런 느낌이 좋았다. 특히 1800년대의 인상파 작품들은 나를 그 시대로 인도하는 듯했다. 전생 여행이랄까. 오르세이 미술관은 원래 오르세이 역(la gare d'Orsay)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이 철도역은 1986년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어쩌면 기차역이었던 그 공간이 주는 시간의 흐름과 움직임 때문일까, 오르세이에서는 그림 앞에 서는 순간마다 나는 그 시대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펠탑- 그래도 파리는 에펠탑이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퐁 디에나(Pont d’Iéna)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에펠탑이 나는 가장 좋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면 에펠탑을 한눈에 가득 담아 배경으로 넣지만, 다리 위를 운전해 지나가며 마주하는 에펠탑은 늘 단단한 1층의 지지대가 전부인 양 그 위 탑은 살짝 얹은 듯한 모습이다. 나는 늘 그 1층 구조물을
보면서, 마치 거인의 다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팔짱낀 거인이 저위 에서 내려다 보는 듯, 소인국에 나오는 소인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을 만큼.
사실 나를 품어주었던 파리는, 에펠탑이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파리와 에펠탑은 내겐 동기화되어 있었다. 파리에 온 첫날 새벽, 처음 마주한 것도 에펠탑이었고, 귀국하는 날 새벽에도, 집 앞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에서 에펠탑에 작별 인사를 건네기도 했으니까.
내게 에펠탑은 이방인 파리지엔느처럼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버팀목이었었나 보다. 꼭대기에 올라 파리 시내를 내려다볼 때, 프랑스 독립기념일 밤마다 에펠탑을 감싸던 불꽃놀이의 황홀함, 그리고 퇴근길 철제 다리 사이로 빨려들 듯 지나갈 때마다 나는 에펠탑을 통해 이 도시와 깊은 연결감을 느꼈다.
작별 그리고 귀국
귀국 전, 후배들과 함께 “한 주 한 송별회”를 기획했다. 그리고 마지막 송별회 장소는 늘 가던 한식당. 그날, "저의 커리어는 프랑스에서 다시 써졌습니다." "이제 프랑스는 제겐 제2의 고향이고,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건배사를 하며 그렇게 내 프랑스를 마무리했다.
드디어
귀국 날 아침, 샤를 드골 공항에서 현지 동료들이 써준 엽서와 편지를 안고 눈물 콧물 훌쩍이며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창문너머 보이는 프랑스를 한눈에 담으며, 프랑스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다음 편에서는 프랑스에서 일하기 (10) – 현지에서 만난 K-동료들을 마지막으로 프랑스 편을 마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