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 한인 동료들이 만들어준 진짜 생활의 온도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프랑스에 도착했던 첫날 저녁 식사부터 선뜻 나타났던 그 K‑동료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주재원 선후배들도 훌륭해 내가 프랑스에 빠르게 스며들 수 있도록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었지만, 진짜 ‘현지 프랑스 생활 핸즈온’은 현지에서 자란 재불 한인 동료들 덕분이었다.
그중에는 이제 막 서른을 지난 아리따운 여자 후배들—경재, 연경, 지희—와 갓 스무 살을 넘긴 젊은 막내, 전산 담당 직원 야닉이 있었다. 이들은 불어와 영어에 능통했고, 예절도 바른,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청년 중의 청년들이었다. 게다가 업무 감각도 탁월하여 본사 그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으니, 그들은 보배 중에 보배들이었다.
경재는 회사 전체 마케팅을 담당하며 사내 외의 주요 VIP 의전과 행사를 도맡았지만, 언제나 웃음이 가득한 친구였다. 웃을 때면 갸름한 얼굴에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며 반달형 미소를 지어주었는데, 파리에서 그녀의 미소는 구름 낀 하늘을 다시 파랗게 만드는 빛 같았다.
파리 모 대학 출신의 수재라 그런지(사실 파리는 ‘Paris 1, 2, 3’처럼 번호로 대학을 부르는데, 이름보다 번호가 더 헷갈리는 함정이 있다), 하나를 말하면 열 개를 챙겨 와서 회사 전체 마케팅 홍보 전략과 그 안의 다양한 제품 연결 매트릭스를 찰떡같이 그려냈다. 프랑스 동료들과 주재원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밥 먹자”는 여러 제안을 뿌리치고 주말이면 늘 브뤼셀로 튀었는데, 알고 보니 브뤼셀에 사는 남자친구—지금의 남편 – 와 목하 열애 중이기 때문이었다. 파리와 브뤼셀을 잇는 TGV—단 1시간 22분—가 만든 사랑이라고나 할까. 그 당시 경재의 웃음은 더욱더 환해서 마치 파리의 흐린 하늘마저 다시 파란 하늘로 변신시키는 마법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은 두 아들의 엄마가 되어 남편을 따라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프랑스 관련 회사에서 워킹맘의 진수를 뽐내며 살고 있다. “어디 간들 못하랴”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경재다
연경은 어느 제품군 마케팅 담당이었는데, 그 실력은 거의 주재원 급이었다. 본사와도 술술 소통하니, “연경의 팬이 본사에도 많다”고들 할 만큼이었고 프랑스 직원들에겐 불어로 카리스마 있게 업무를 지시하던 친구였다.
회사의 행사를 준비하다 만난 날, 그녀는 우사인 볼트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이는 존재였다. “연경아, 그거 말이야…”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일을 시작하거나 그 장소에 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돌급 외모—작고 하얀 얼굴, 보기 드문 서구형 두상, 반듯한 이목구비—덕에 멀리서 보면 ‘파리지엔느 인형’ 같은 연경이었다. 사실 그녀는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따라 파리로 이민 와 “프랑스어 한 마디 못한 채”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어떻게 공부했냐고 묻자마자 즉시 “그냥 다 통째로 외웠다”라고 하는 그녀는, 진짜로—천재였나 보다 싶었다.
그 연경이가 사내 커플이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회사 멋진 한국 친구와 결혼해 아들의 엄마가 된 후, 나의 마지막 해에 한국으로 영영 귀국했다. 연경은 이삿짐 싸다가 – 파리에는 이삿짐 센터가 없으니 그냥 혼자 싸야 하는 슬픔이 있다 – 송별회에 늦어서 이미 술에 취한 우리에게 연신 미안하다며 즐거운 기억을 선사해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연경은 그동안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병이 발견돼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며 내가 묻기도 전에 진단부터 치료 과정까지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수술하면 괜찮다”라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씩씩함 덕분에 수술 후 완치되었다는 소식도 들렸고 간간이 만나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씩씩함을 회복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이제는 중2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는 열혈맘으로 사는 그녀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지희는 한국에서 유학 와서 프랑스 현지 회사에 그대로 취직해 버린, 겉보기엔 ‘한국의 미의 향기’가 폴폴 나는 친구였다. 하지만 속에는 무던한 끈기가 있었고 친절하면서도 일 못하는 현지 동료들에게는 사감 선생님처럼 엄격하기도 한 친구였다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주재원 회식 자리마다 지희는 늘 함께했으며 함께 일하는 동료 주재원들 사이에서는 ‘쁘띠 주재원’ 같은 핵심 존재로 여겨졌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유명 대기업에 재취업했는데 그곳에서 나의 직장 후배와 인연이 이어지며 뜻밖의 한국에서의 재회를 이루었던 친구이기도 하다.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형 워킹맘으로 동분서주하며 자리를 지키는 지희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여정 위에서 누군가에게 든든한 버팀목 같을 존재일 것이다.
이 세 친구가 먼저 떠오른 건 내가 회사를 퇴사할 즈음, 다시 만나게 된 인연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프랑스에서 일하며 함께 경험한 추억과 험담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었을 텐데 문화가 전혀 다른 프랑스인과 한국인을 동시에 이해하고, 때로는 그 사이에서 브리지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 사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했을 현지 동료들이었다. 그나마 프랑스, 워킹우먼, 엄마 같은 공통 키워드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그 친구들과 한번 더 만날 예정이다
아, 야닉, 젊은 막내 동생이다. 이 친구는 내가 프랑스에 집을 얻었을 때 인터넷 설치부터, 컴퓨터가 이상하다고 하면 ‘사용자 문제’라며 친절하게 해결해주곤 했다. 정작은 주재원들과 회식 때 늘 함께하며 우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애늙은이 같은 친구였다. 중부 아프리카 아비장에서 자라 부모님이 오랜 교민으로 계셨고, 야닉은 파리로 유학 와서 공부하다 현지의 우리 회사에 취직했다. 부모님의 교육 덕분인지 진중함이 물씬 풍기는 친구였고,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한국 형·누나들을 일일이 챙기며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세대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야닉은 어느 유명 술회사로 이직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내가 귀임을 앞두고 있다니 기꺼이 나의 송별회에 와 내 귀임을 축하 혹은 아쉬워해준 막내이자 든든한 동생이었다. 최근에는 모에○○라는 큰 회사의 디렉터가 되었고 변호사인 피앙세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친구들 덕분에 나는 프랑스에서 정말 잘 지낼 수 있었다.
다음 편은 ‘돌아와서 자리 잡기’ 편으로 연재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