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눌러 담은 파리
떠나기 전 몇 주는 그야말로 마음이 부산했다. ‘파리에서 아직 안 가본 곳을 가봐야 하나?’ ‘아니면, 이미 다녀온 곳들을 조용히 음미하며 기억해 놓을까.’ 그렇게 다시 찾아간 몇몇 장소는, 내가 파리에서의 5년을 잘 마감했다는 증표처럼 남아 있다.
개선문(Arc de Triomphe) – 역사의 입구
프랑스의 전성기,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6년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해 건립을 지시했지만, 정작 완공 전 사망해 직접 통과한 적은 없다. 이후 194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하며 개선문 앞에서 행진했고, 1944년 파리 해방 때에는 연합군과 드골 장군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해방 행진을 했다고 하니 수많은 역사적 장면 속에 늘 등장하는 이 문이, 내겐 시간의 입구와 같은 느낌이 있어 좋았다.
아치 정중앙에 서면 저 멀리 라 데팡스(La Défense)의 그랑드 아르슈(Grande Arche)가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쭉 뻗은 샹젤리제 거리 (Avenue des Champs-Élysées )가 펼쳐진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퍼져 있는데, 이 구조는 프랑스 근대 도시계획과 오스망 양식(Haussmann style)의 상징이자, 현대 도시 설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매일 진입과 탈출이 쉽지 않았던 라운드어바웃’, 개선문을 빠져나갈 때마다 고난도 운전 미션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카페 푸케 (Café Fouquet’s)-고요한 낭만의 입구에서
그 개선문 아래, 넓게 펼쳐진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Élysées). 그 거리의 오른편, 조르주 생크 거리(Rue du Faubourg Saint-Honoré)와 만나는 지점 근처에 바로 그 유명한 카페 푸케(Café Fouquet's)가 있다. 1899년 문을 연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프랑스 지식인과 예술가, 정계 인사들의 단골 장소였고, 특히 세자르 영화제(César Awards)가 끝난 뒤 배우와 감독들이 축하 파티를 열던 곳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고급 브라세리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 그곳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샹젤리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리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 틈에서 눈을 감으면, 어느 순간 양산을 든 귀부인과 파이프를 문 신사들이 사각사각 돌길을 걷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이 거리 한복판에서 K-전자제품을 팔았다고?” 웃음이 났다.
노엘 마켓 (Marché de Noël)- 치트키 뱅쇼
샹젤리제 끝,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인근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노엘 마켓(Marché de Noël)이 열린다. 프랑스 전역의 소상공인들이 손수 만든 장갑, 모자, 가방, 장식품 등을 파는 작고 아기자기한 벼룩시장 같은 풍경. 크리스마스 선물용 마켓이기도 하다. 마침 연말 분위기 한참이라 나는 노엘 마켓을 갔다. 사람구경, 물건구경, 가격 흥정에 매대와 매대사이의 좁은 공간을 비집고 다니는 그야말로 붐비는 시장의 맛이 있다. 그곳의 치트키는 단연 뱅쇼(vin chaud, 따뜻한 와인). 겨울 공기 속에서 뱅쇼 한잔을 마시는 그 순간, 모든 피로와 추위가 눈처럼 녹는다.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가장 파리답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랑 팔레(Grand Palais), 쁘띠 팔레 (Petit Palais).– 설렘이 머물던 궁전
그리고 나의 애정이 깃든 곳, 그랑 팔레(Grand Palais)와 쁘띠 팔레(Petit Palais). 이 두 건축물은 파리 샹젤리제 근처에 마주 보고 서 있으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전시회나 패션쇼, 각종 행사장으로 활용되는데, 궁전 안을 거닐다 보면 언제나 고풍스러운 설렘이 나를 감쌌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그랑 팔레가 전 세계 펜싱 경기장으로 우아하게 대여되며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집에서 경기를 보며 “저기, 내가 자주 갔던 바로 그 장소야!” 하며 가슴이 뛰었다. 그 공간에서 한국 선수들이 메달을 거머쥐는 모습을 보며, 묘하게 뿌듯하고 뭉클했다.
그렇게 파리의 거리와 건축, 그 위에 쌓인 시간의 결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만의 파리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싶은 장소들이 더 남아 있었다.
목요일에 연재될 다음 편에서는 단지 관광지를 넘어,
‘나의 감정’과 맞닿아 있었던 파리의 장면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