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번, 선생님 불러서 왔습니다_04
교화소에 가자마자 신체검사가 있었다. 우리 탈북자 여자들은 암만 아파도 병반이 없고 모두 신입반이라는 데 배치되었다. 한 달은 거기서 옷 수리하는 일을 하고 교화소 규정 세칙을 다 외웠다. 바지도 뜯어서 흰 천을 대었다. 옷이 해져서 대는 것이 아니라 어디 가도 교화생이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새 옷이어도 잘랐다.
동복도 팔을 잘라 색이 다르게 너랑 나랑 바꿔 달게 하고 머리는 귀 위로 싹 자르게 한 다음에 흰 수건을 썼다. 얼마나 망측한지 모른다. 교화소 나와도 그 머리가 채 길지 않아서 외출하기도 민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남자들은 스포츠 머리로 짧게 깎지만 여자들은 머리 위 귀 위까지 직선으로 깎았다. 흰 수건은 항상 쓰고 다녀야 했다. 일하러 나갈 때 들어갈 때 그걸 쓰고 딱 잘 때만 벗을 수 있었다. 교화소 옷차림이 그랬다. 너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고 한 순간도 잊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다섯 시에 기상해서 인원 점검을 하는데 군복 입은 간수들이 툭 지나가면 우리가 한 명씩 번호를 셌다. 우리는 이름이 없었다. 내가 김동주라도 김동주라는 이름이 없고 그냥 235번이었다. 점검할 때는 그 번호를 부르는 게 아니라 하나 둘 셋 넷 몇 명이 인원수를 세야 했다. 그러다가 애들이 이렇게 골을 숙이고 있다 보면 깜박 졸아 번호를 못 세고 건너뛰어 넘어가면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서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그런 날은 정말 아침밥이 들어올 때까지 그냥 하나 둘 셋넷 계속 세어야 됐다. 그러고 난 다음에 8시부터 작업을 나가는데 작업 나갈 때 문밖에서 또 번호를 세어 몇 명이라는 걸 대야만 외출 작업을 나간다. 12시가 돼서 들어올 땐 문밖에서 또 하나 둘 셋넷 세서 우리 70명이 나갔다면 그 70명이 딱 맞아야 들어왔다. 그니까 우리 중 반장이라는 애는 그 있는 숫자를 틀리면 안 되니까 같은 수감자들한테 얼마나 소리치고 구박했는지 모른다. 누구 면회나 오면 타온 음식물 떼먹고 교활한 짓을 하는 데 그것도 개쌍년이었다. 다른 수감생들한테 일 시키는 것도 보면 자기한테 콩고물이 떨어지니까 면회를 잘 오는 애들은 헐한 일을 시키고 아프다 하면 일도 안 나가게 떨궈 놓고. 그런 작은 감방에 있는 반장도 주머니 차고 권력이 있다고 그런 일을 했다. 다 똑같았다. 크든 작든 권력이 있으면 다 그러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학습이 있는데 김일성이 쓴 뭐 아니면 김정일 신년사라면서 당 중앙 호소문이라는 걸 또 외운다. 매일 밤 감방 안에서 세칙을 외우느라 머리가 아팠다. 우리한테 이미 검은 사상이 찬 데다가 맨날 그 뭐 빨간 사상 들어 넣느라고 하는데 우리 귀에 들어올게 뭐야. 어떻게 하면 빨리 죽지 않고 이 감옥에서 나가겠는가 하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쩔 땐 진짜로 외워야 했다. 언제까지 하라며 윽박지르면 취침시간도 없이 꾸역꾸역 외웠다. 밤 10시면 자긴 자는데 잘 때 수감자들이 두 시간 교대로 감시 보초를 선다. 서서 다른 사람들이 뭐 나쁜 짓을 하지는 않는가 안 자고 감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새벽 5시에 기상 종이 울리면 그땐 다 일어나 앉아있고 어쩌다 취침시간 아닐 때 눈 붙이는 걸 교관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그 감방이 통째로 벌을 받으니까 애들이 그저 서로 감시하고 서로 일어나라고 승냥이처럼 집어 뜯었다.
수감자끼리 야 나는 나가면 중국에 갈까 어디로 갈까 하는 소리까지 옆에서 듣고서 고발하는 족속도 있었다. 그러면 그게 보름에 한 번 하는 사상 투쟁에서 또 문제가 돼가지고 독방으로 보내졌다. 아무개는 어떻게 해서 몇 월 며칠 무슨 잘못했다 어쨌다 하면서 세워놓고 일주일 동안 독방 신세인데 나는 다행히 그런 데 아니 앉아봤다. 독방 앉은 애들은 무르팍 꿇고 앉아 있어야 해서 겨울엔 발이 다 얼고 감방에 바로 눕지도 못하고 다리 필 수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처참한 꼴로 나온 애들을 보면 정말 끔찍했다.
정말 한국에 와서 보면 조사받는 사람들도 피투성이 되는 경우는 있는 것 같지 않다. 살인범죄라도 뉴스를 보면 북한처럼 고문하는 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북한에선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죽을 만큼 맞아야만 하니 사람이 병이 아니 생길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그저 그 담당 선생이나 인간들은 그렇게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는 게 습관적인 것 같았다.
한 번은 계호가 방으로 나랑 몇 명을 불렀다. 혼자 간 게 아니라 셋이 앉아서 계호가 이거 때리고 저거 때리고 하니까 한 명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죽도록 맞았다. 셋이 가서 이렇게 무르팍 꿇고 계호 앞에 앉아서 ‘235번, 선생님 불러서 왔습니다.’ 했더니 선생이 ‘너 조장 아무개한테 왜 데꾸질 했니?’ 하고 물었다. 바로 잘못했다고 빌어도 맞지만 단판에 잘못했다고 안 하고 핑계를 말하면 더 맞는다. 난 바로 잘못했다 했는데도 우리 세 명이 죽어라고 얻어맞고 코피가 났다. 발로 차고 손으로 머리도 때리고 자기가 좀 힘들 때는 산에서 주워 온 몽둥이로도 때렸다. 무슨 짐승이 말 안 듣는다고 때리는 식이었다. 조장이 일을 시키는 게 공평하지 않아서 왜 이렇게 하냐고 말한 것을 조장이 선생님한테 고발해서 피를 보고 끝이 났다.
어쩌다 누가 도주라도 하면 사이렌이 울리면서 일하던 것을 다 멈추라 하고 집합을 시킨다.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도망자들은 결국에 다 잡혀 왔다. 그러면 매 맞다가 거의 반죽음이 된 애가 들어와 가지고 사상투쟁을 하고 걔를 낙후반에 넣는다. 낙후반에서는 그 무거운 철통을 어깨에 메고 똥을 나르는 일을 시키는데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죽어나갔다. 낙후반에 배정하는 건 결국 죽으란 얘기였다. 이십 킬로 정도 나가는 두꺼운 쇠통을 메고 나르라 하니 어깨 가죽이 다 벗겨졌다.
사상투쟁은 마당에서 하는데 거기 앉아 들어보면 서로 비판하는 것이 아주 서로 사람을 잡게 한다. 그 안은 동정이라는 게 없고 정말 무서운 승냥이 굴이 따로 없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위해주는 거 없이 사랑이라는 건 찾으려야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자기가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남을 신고하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봤을 때 한 인간으로서 사는 삶이 이런 건가 환멸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건지. 내가 지금 한국에 와서 북한 사람을 보면 그 습성이 아직도 있는 거 같다. 단지 무슨 교화 생활을 안 했대도 서로 감시하고 물어뜯고 남 잘 되면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것이 있다. 나도 탈북자이고 물론 탈북자라도 다 그런 것이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으면 그럴 때 옛날에 당한 것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럼 그저 이렇게 혼자 있는 게 편안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화소 생활이 무서운 게 사실 단순히 못 먹고 못 입고가 다가 아니라 서로의 인간관계를 다 갈라놓는다는 거다. 단합하지 못하도록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감시하게끔 만드니까 사람이 좀 돼먹지 못한 애들은 그대로 따라서 막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못되게 군다. 하긴 그건 어디나 그런 것이 여기 와서 한국도 회사나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아남는 전략 중 한 방법이 누구한테 겉으론 좋게 했다가 없으면 남 이야기하는 거였다. 근데 정말 교화소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구라도 밟아야 하고 내 너를 죽이고 서야만 내가 살 수 있다, 너를 잡아먹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그곳 생활을 지배했다. 한국도 회사나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아남는 전략 중 한 방법이 누구한테 겉으론 좋게 했다가 없으면 남 이야기하는 거였다. 근데 정말 교화소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구라도 밟아야 하고 내 너를 죽이고 서야만 내가 살 수 있다, 너를 잡아먹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그곳 생활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