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나는 열심히 살겠다_06
여기 나가서 일할 때면 작업 자체를 말없이 하니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데 북한을 생각하면 오늘도 이런 날에 교화소 생활, 단련대 생활 하는 사람이 있겠구나, 이 시간에도 도강하느라 애를 쓰는 사람, 한국 오는 사람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피뜩 피뜩 든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평화롭게 풀렸으면 좋겠다. 정말 내가 기독교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도 그런 사람들이 다 편안했으면 좋겠다. 나처럼 고생하지 말고 힘들게 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그렇게 될지. 그 사람들이 누군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을 생각해 준다는 걸 안다면 힘이 날 텐데. 모든 사람이 다 좋은 세상을 만났으면 좋겠다. 아까도 중국에 있는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왜 중국에 자기를 보러 오지도 않고 자기를 한국에 데려가려 하지도 않느냐는 것이다. 자꾸 다른 남자가 생긴 게 아니냐며 의심하고 추궁해 대는데 이제는 스트레스를 받고 머리가 아파서 전화도 받기가 싫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살게 가짜 신분증도 만들어 줬고 내가 북한으로 끌려갔을 때 돈도 보내준 사람이다. 남편한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어서 작년엔 돈을 좀 모아서 보냈다. 좀 있으면 아들이 한국에 오는데 그러면 돈도 많이 필요하고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드니 여기서 터를 잡은 사람을 만나서 함께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고, 이제 와서 자유를 찾았으니 나도 한국에서 여기 나름의 삶을 살아야겠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게만 하니 야속하다. 무엇보다도 죽으면 죽었지 절대 중국에 가고 싶지 않다. 혹시 또 그런 일을 당할까 봐. 이젠 내가 한국 국적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고는 하지만 티비에서 납치됐다는 소리 들으면 무섭고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니까. 정말 내가 다시 잡혀간다면 못 버텨낼 것 같다. 작년에는 10일 다녀왔는데도 마음이 불안하고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고 마지막 밤까지 오늘 하루 밤만 무사히 버텨내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중국 공항에 가서 공안한테 여권을 내밀 때 얼마나 떨렸는지 길에서 공안 옷 입은 사람만 봐도 나를 어쩌지 않는가 싶고.
그래서 더 중국 가기 싫다. 상황이 바뀌었어도 마음은 그때처럼 두렵고 무섭다. 우리 자식들이나 남편은 이제 괜찮은데 왜 그러냐, 왜 무서워하냐고 하면서 이해해주지 못하고 그러니 중국 집에 가면 서로 짜증만 내고 부부 사이도 안 좋아졌다. 그래서 내가 남편도 안 데려오고 차라리 이제 내가 다 돈 벌고 사는 게 낫겠다 결심을 한 것이다. 여기서도 사이렌 소리 들리고 경찰들이 보이면 자꾸 두려워서 못살겠는데 중국을 오라고 하니까. 나는 진짜 가기 싫다.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생각하면 못 간다. 교화소, 단련대를 마치고 나왔으면 내 몸이 자유를 찾아야 되겠는데 내 뒤에는 그림자가 또 붙어있었다. 보이지 않는 철창이 앞을 가로막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십 리 밖에만 가도 걸음걸음은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산 하나 너머에 있는 고모 집에 가도 나를 감시하러 사람이 왔다. 남들은 어떻게 딸이 자식을 낳는데 안 가볼 수 있냐 하겠지만 나는 다음 달에 딸이 중국에서 해산하는데 그래도 중국에 못 가겠다고 했다. 중국도 가기 싫고 혹시 북한에서 죽이러 오진 않을까 무섭기도 하고 혹시라도 잘못되는 게 아닐까 싶고 그래서 북한을 생각하면 빨리 허물어졌으면 좋겠다.
한국 자유민주주주의처럼 대통령도 욕하겠으면 욕하고 책임을 물어야 국민을 무서워하지, 북한에서 김정일이 욕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채가니까 우리는 국민이 주석을 맞춰주고 살아야 한다. 여기는 대통령이 국민을 맞춰주니까 북한이랑은 반대로 진짜 대통령이 국민을 무서워하겠더라. 세상을 만들어 놓는 게 국민이니까 참 좋은 세월이고 세상이 정치가 잘 됐지. 북한도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는지 모른다. 북한은 가망이 안 보인다. 박근혜가 그렇게 되니까 북한 방송에서 박근혜 보고 남조선 병든 사회라고 세 살 먹은 애들처럼 선전할 거 뻔하고 그럼 북한 국민은 진짠가 하고 입을 헤벌리고 한국 다됐다 어쨌다 생각하겠지. 앞에서는 다른 나라들이 인권유린이다 뭐 어쩐다 하면서 말로는 하는데 안 될 것 같다.
일하다 보면 하나센터나 어디 단체에서 탈북자들 캠프 가자 나들이 가자는 소식이 온다. 살갑게 연락 와서는 나와서 바람도 좀 쐬고 하라는데 우리같이 일 하는 사람들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출근해야 됩니다, 하고 문자 보냈다. 내가 배려를 받자는 것보다도 우리는 밤낮으로 일을 하느라 애를 쓰는데 계속 집에서 노는 사람들만 주말도 아닌 평일 때 정부에서 주는 돈 가지고 놀러 가니까 그럴 때 보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회사를 안 가면 그 일이 또 지연되고 어떻게든 회사에 잘 붙어있어야 하는 형편인데 이쪽에서 하루 쉰다고 하기도 쉽지가 않다. 혜택을 줄 거면 일 열심히 하고 정착 잘하는 사람한테 줘야 되는 걸 놀고 있는 사람들한테 주니까 오히려 정착 잘하는 사람한테 역작용이 난다.
아무튼 이 땅에 와서 많은 걸 배우게 됐다. 북한보다 훨씬 발전된 낯선 나라에 오니 처음엔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가 턱 막혔는데 그래도 한 걸음 두 걸음 나가보니까 하나씩 길이 열렸다. 마음 같아선 그게 한꺼번에 콱 열렸으면 좋겠는데 다시 막힌 곳에 맞닥뜨리기도 하고 그런다. 하나원에 있을 때 정착이 중요하다 해서 그게 무슨 소린가, 그냥 사는 것이 뭐 어려울 게 있는 가 했는데 나와서 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스트레스가 정말 힘들었다. 북한사람은 앞에서 정면 치기로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한국 사람들을 보니까 앞에선 살살 날 좋게 얘기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고지식하게 말하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아 그렇구나 하는데 여긴 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에 나이 든 사람이 많은데 날 보고 난 아직 젊으니 얼른 퇴사하고 다른 회사, 좋은 회사로 가라는 말을 해줘서 나도 나가려고 맘먹고 회사도 찾아보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나이가 육십이 넘은 자기들이 잘리게 생겼으니까, 우리가 나가야 자기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였다. 야, 여긴 이렇구나 했다. 그 와중에는 누가 그런 소리 한다고 나갈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직원들끼리 말 나오는 것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대한민국 주민, 탈북민 다 같은 국민인데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돌아가며 쉬는데 한국 사람들 세 번 쉴 때 나는 벌써 여섯 번 쉰 적도 있다. 한국 땅에 진짜 나는 애써 살자고 왔지 이렇게 날라리 피우러 온 건 아니다. 우린 바닥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놀기도 싫다.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자꾸 쉬라고 하니까.
월요일 날 쉬고 화요일 일하고 수요일 날 쉬었다. 근데 그 사장보다도 밑에 그 차장이나 과장 그런 인간들이 그렇게 차별을 놓았다. 북한에서 고생하는 거하곤 또 달랐다. 북한에선 먹고살려고 쓰레기 뒤적거리고 힘들긴 하지만 여긴 북한보다 더 힘든 게 있다. 북한에서 힘들었던 생각을 하고 그냥 버티려고 했는데 싫은 소리 안 듣고 살아남기 위해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기지게차 운전하는 법을 배워서 다른 자리로 들어갔다. 지게차에 올라가니까 처음엔 빙빙 돌고 무서웠는데 한 삼일 배우니까 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여기까지 오는데 죽을 고비가 많았는데 어떻게든 살아남게 한 의지는 북한이 길러준 거다. 내가 한국 와서도 못한다는 거 없이 하겠다고 나설 때 보면 북한에서 너무 고생했으니까 네가 하는데 내가 왜 못하나 그런 배짱이 있다. 그건 북한에서 길렀다.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살아온 것만으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여기 와서도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살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열심히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