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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 번째 집

미음 한 술의 약속_05

by NKDBer Mar 14. 2025

 교화소에서 일을 시키는데 산에 올라가 계곡에 발 적시고 오들오들 떨면서 두 시간씩 나무를 했고, 광산에 가서는 돌을 나르는 기계수단이 안 되어있으니까 포대로 자루를 직접 만들어서 쓰는데 그것도 시원치 않아 며칠 만에 해져서 매번 다시 만들었다. 그 돌을 나르려면 두세 시간씩 산을 넘어야 해서 산길을 정말 죽을 지경으로 다녔다. 풀을 맬 공구도 없어서 호미 하나를 몇 명이 나눠 썼다. 공구가 없어도 허리 한 번 못 펴고 맨손으로 풀을 집어 뜯어야 했다. 부식이라는 게 없는데 배는 고파 죽겠으니 교화소 안이며 밖이며 다니면서 안 먹은 풀이 없었다. 웃기게 생긴 가마에 풀이란 풀은 다 뜯어서 넣고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워 데쳐가지고 먹었다. 지금이야 길가에 난 풀도 풀일 뿐이고 지금 내가 앉아서 그걸 데쳐먹으래도 못 먹겠지만 그때는 너무 배가 고파서 그 풀도 그렇게 맛이 있고 없으면 먹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것도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 나온 걸 생각하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열병이 오는데 난 감기 한 번 안 왔고 허약이 와도 설사는 안 왔다. 허약에다 설사까지 왔으면 내가 죽었을 거다. 내가 허약 2도가 왔을 때 하루는 콩털기를 갔다. 너무 배가 고파 콩을 조금 숨겨가지고 들어왔는데 다른 수감자가 내 몸수색을 하다 콩을 발견하고 계호에게 일러바쳤다. 지금 내가 57킬로가 넘는데 그땐 28킬로까지 줄었었다. 허약이 와서 비틀비틀하는데 계호가 왜 콩을 훔쳤냐고 배를 발로 퍽 차니까 버둥버둥거릴 뿐 일어나질 못하니 옆에서 다른 애들이 일으켜 세워줬다. 그땐 살이 하나도 없으니까 가죽만 남아서 누워도 뼈가 배기고 앉으려 해도 엉치 뼈가 배겨서 앉지도 못하고 내가 내 얼굴을 봐도 사람 같지가 않았다. 허약 3도 판정을 받은 애들은 머지않아 다 죽어 나갔다.     


 교화소에 오기 전 구류장에 있을 때 거기 보위부는 물에 무슨 독약을 쳤는지 그 물만 먹으면 구류장 애들이 설사를 쫘악쫘악하매 구토를 해서 막 질질 끌려 나가는데, 그걸 보고 온성 보위부랑 신의주 보위부에 먼저 잡혀갔었던 아이들이 ‘야, 가서 될수록 감방 물 마시지 마라. 그 물만 마시면 피똥 싸게 된다.’ 고 말해줬다. 난 그 말을 듣고 갈증 나고 힘들어도 거기 물을 마시지 않고 간수들이 직접 주는 물 조금으로 겨우 입을 축였다. 그렇게 물을 안 마시니 변비가 왔는데 아닌 게 아니라 갈증을 못 참고 감방 물을 마신 사람들은 피똥을 쌌다. 그 보위부 감방 물은 교화소가 있는 불망산의 골짜기에서 나온 물이라 했다.    

      

 교화소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다 묻지 못하니까 남자들이 두 달구지씩 싣고 나가서 산중 어디에 모아 한꺼번에 가뜩 불태웠다. 거기서 흘러나온 개울물을 먹으면 그렇게 설사를 하고 피똥을 쌌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 어느 날은 노란 연기가 올라오고 일하다가도 그 사람 태우는 노린내에 속이 얼마나 올라오는지 몰랐다. 2011년 겨울에 역병이 돌았는데 하루에도 두세 명씩 죽어나갔다. 내 옆에 언니는 나랑 이야기하다가도 푹 고꾸라지고 ‘언니야, 나는 살고 싶다’ 말해놓고 죽어서 나갔다. 정말 내 곁에서 죽은 사람만 수없이 많았다. 남이 죽은 건 알지만 내가 죽을 건 몰랐다. 옆 사람이 죽으면 내 차례가 곧 오지 않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근데 시체에선 왜 이가 그렇게 나오는지 나는 끔찍했다. 사람도 피 빨아먹을 게 있어야 빨아먹지 이도 굶었을 거다. 누가 죽으면 시체에 이가 너무 많이 나와서 손으로 쓸어야 했다. 한국은 물도 다 소독하고 목욕탕도 여기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간다는데 말이 일주일에 한 번이지 집에서도 오늘 일 끝나고 와서 샤워해도 되고 한국은 시설이 다 좋다. 교화소 있을 땐 머리 한 번 제대로 못 감아서 세상에 큼직한 먼지가 덕지덕지했다. 설이나 되면 일 끝나고 녹물을 들고 와서 그걸 갖고 머리를 감으니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북한에서는 가루비누에다 머리를 감는 게 최고의 고급 수준이었다. 화학공장에서 나오는 양잿물에다가 옥수수 강냉이 눈깔을 말려가지고 가루를 내서 섞어 감는 것이다. 


 교화소엔 그런 것도 없어서 남이 머리 감은 물에다 대충 감아내야 되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비위생적이고 더러운 시설에서 살았는지 그 어쩌다 한 달에 한 번씩 목욕이 차려지면 세상에 정말 그 물을 생각하면 지금은 차라리 안 씻을 것 같다. 4월부터는 계곡에라도 나갈 수 있으니 춥긴 해도 좀 나았다. 겨울에는 한 달에 한 번도 겨우 할 때도 있고 여름에는 며칠에 한 번씩 선생님들이 목욕 조직하라 하면 빨래도 거기서 다 해가지고 들어와 늘어놓곤 했다.   

       

 구류장은 물이 잘 안 나와서 변기물도 내려가지 않았다. 우리는 뚝 누르면 물이 내려가는데 거긴 그렇게도 못해서 감방 안에 찌릉내가 얼마나 나는지 감방이라는 게 그런 화장실에 같이 붙어 있어서 위생이 열악했다. 한국은 물도 마음대로 쓰지 깨끗하지 더운물도 돈이 아까워 안 써서 그렇지 쓰고 싶으면 쓰고 난방도 틀고 하는데 감방에선 나무 뗀 적도 없었다. 거기는 골짜기니까 10월부터 눈 오기 시작하면 5-6월은 돼야 따뜻해지고 넉 달, 다섯 달 못 되어 또 추위가 왔다. 감방을 데울 건 사람의 온기밖에 없었다. 하루는 아파서 일을 못 나갔는데 오십 명 빼곡히 앉아 있던 곳에 불도 떼지 않고 혼자 앉아 있으려니 추워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있는 옷이란 옷 다 껴입고 웅크리고 있었는데도 추웠다. 정말 어떻게 춥기는 그렇게 추운지 그 추위를 이겨내고 여름이 오면 이 겨울도 내가 살았구나 했다.     


 교화소에서 나와서 회충약을 먹었는데 진짜 어디 가서 말하기 메스꺼울 정도로 회충이 나왔다. 변에 대변이 나가는 게 아니라 한두 마리도 아닌 회충 뭉치가 이렇게 국수 내려가는 것처럼 쫙 내려가는데 진짜 내가 봐도 끔찍했다. 야 저 벌거지들이 내 배안에 있었구나... 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메스꺼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이 상상도 못 할 일을 내가 겪고 왔으니까.... 끔찍했다. 한국에서 회충약을 먹어도 그리 나갈 것 같지 않다. 그 회충들이 나오는 게 교화소에서 일 나갔을 때 보안원 몰래 풀뿌리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중에 흙만 겨우 털어 날 거로 먹고 생식을 했으니까 거기서 온 것 같다. 요즘 집에서 채소를 씻을 때면 북한에서 생식하던 생각이 나서 이거 빡빡 씻어먹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나이 먹은 분들도 옛날에 못살았어도 그건 못 겪어 봤을 거다. 우리처럼 북한에서 감옥생활 한 사람만 오직 겪어봤지 세상에 그게 한 번 뿐이 아니라 몇 차례 그렇게 나왔다.   

                       

 날이 풀리면 제일 먼저 올라오는 쑥을 다 뽑아 먹고, 4월~5월에 감자랑 콩을 심는데 그걸 면회나 오고 배부른 아이들을 시켜야 그 콩알을 안 먹는데 면회 안 오는 아이들은 콩알을 다 먹으니 시키지도 않았다. 강냉이도 감자 움따기도 하다 다 먹어 치울까 봐 배부른 애들로 몇 명 골라서 시키고 6월에 감자밭 김맬 때는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니까 다 시키는데 아무리 먹지 말라 해도 시꺼먼 손으로 엎드려 먹었다. 한국에선 어찌 이 사과는 맛이 없냐 하고 안 먹을 때도 있던데 그땐 그 생감자를 독이 있는지 없는지 껍질 채 사과처럼 먹었다. 가을에는 더했다. 강냉이랑 콩알을 까서 생으로 먹고 가만가만 조금씩 신발이나 이런데 감춰 오면 그걸 또 다른 교화생들이 악착스럽게 검사해서 들키면 옆에서 선생들한테 죽을 만큼 맞았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재우지 않고 두 시간씩 교대하는 야간 경비를 통으로 시켰다. 그다음 날은 다음날대로 일 나가야 돼서 진짜 힘들었다.

          

 거기는 누가 면회 와서 넣어주지 않는 이상 옷도 신발도 공급이 없었다. 그래서 면회 많은 애들한테 신발을 샀다. 교화소에선 돈 대신 밥이 통했다. 단지밥 두세 개에 신발을 살 수 있었다. 이런 건 북한 사람들도 교화생활을 안 해봤으면 못 들어봤을 거다.

      

 저녁밥이 오면 걔는 내 것까지 두 끼를 먹고 나는 배고파도 참고 그 신발을, 옷을 얻어 내는 것이다. 아침 점심은 일해야 되니까 먹고 저녁은 배고파도 잠을 자면 되니까 주로 저녁밥을 굶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뭐 엄청 맛있는 밥인 것처럼 들리는데 목숨만 겨우 붙어 있을 정도로 줬다. 절인 배추를 넣고 국을 끓이는데 된장은 구경도 못 했고 돌소금, 짐승들이 먹는 소금만 가뜩 쳐서 끓인다. 옥수수밥도 꾹꾹 누르면 한 숟갈은 되겠는지. 그거 말고는 반찬도 없었다. 하여튼 뭐 하나 얻어 내려면 이마저도 이틀 삼일씩 안 먹고 버텼다.                         

‘내 입에 미음 한 술 떠준 건 곁에 있던 동무들이었다. 죽어도 난 그런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내 입에 미음 한 술 떠준 건 곁에 있던 동무들이었다. 죽어도 난 그런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동생들이 면회를 안 와서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다. 형제들한테는 표현을 안 했지만 형제들에 대한 안 좋은 마음이 있다. 우리가 한 핏줄이니까 내가 돈도 보내주고 했지만 진짜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은 북한 동무들이었다. 내가 교화소에서 몸이 망가져 죽어갈 때 동생들은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다. 내 입에 미음 한 술 떠준 건 곁에 있던 동무들이었다. 죽어도 난 그런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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