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간나, 죽일 것들_03
십여 년 전 어느 겨울날, 보안서*로 향하는 호송 열차 안에서 추위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나를 두들겨 깨웠다. 눈을 떴는데도 눈앞이 컴컴했다. 정전인 것 같았다.
“쉿, 나다. 우리 튀자.”
고향 언니였다.
“피곤하지, 언니야.”
처음엔 비몽사몽간에 무슨 말인가 했다. 튀자고? 어딜? 잠이 확 깼다. 추위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요동쳤고 무서움은 이내 지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흥분감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번이라고 성공할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잡히면 단련대에 끌려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건데.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으로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야, 뛰자.”
언니가 다시 재촉하며 한쪽 수갑을 잡아끌었다. 보안원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자기네들이 추우니까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그래, 가자, 하고 언니 손을 잡았다. 한쪽씩 채운 수갑이 부딪혀 절그럭 소리를 냈다. 혹여나 깰까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기어 나오니 추위가 몰아쳤다. 10월 말 그 추운 산 속인데 옷은 잡혀 나올 때 그대로 한 여름 홑옷이었다.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보니 저 밑이 아득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밭을 가로질러 저 멀리 보이는 산으로 향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까 차에서 내릴 때 구르면서 짓이겨진 상처가 수갑에 스칠 때마다 쓰라렸다. 정처 없이 어딘지도 모르는 산 깊은 곳을 헤맸다. 한숨 돌리고 보니 우리가 타고 있던 열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따돌렸다는 안도감에 배고픔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수갑에 긁힌 언니 손목도 말이 아니었다. 내가 주먹만 한 돌을 하나 주워 그 돌로 수갑을 내려찍었다. 기진맥진한 언니는 이를 악 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쯤 걸렸을까, 돌에 맞은 수갑이 턱 열렸다. 둘 다 세게 조였던 팔목이 벌겠다.
역에서 도망쳤다는 것 밖에는 모르고 산을 넘고 넘는데 사람 그림자만 봐도 심장이 덜컹했다. 그곳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걷고 걷다 보니 눈에 익은 길이 나왔고 언니와 나는 예전에 산을 탄 기억을 더듬어 가며 고향에 들어가는 길목까지 왔다. 언니는 고향으로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나도 언니가 거의 10년 동안 딸을 못 봤다는 걸 알았지만 누가 우릴 신고라도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어떻게든 두만강으로 가야 했다. 내가 멈춰 서자 언니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여기 와서 내 딸 못 보면 안 된다. 여기까지 와 놓고 그냥 못 가. 너도 동생들 있잖아. 얼굴이라도 보고 가자, 응?”
중국에 있는 내 자식들을 생각해서 그때 대담하게 혼자라도 떠났어야 할걸, 그걸 뿌리치지 못하고 같이 고향에 들어갔다. 언니와 나는 먼저 마을 입구에 있는 남동생 집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일을 간 것 같았다. 내가 난처해하자 언니가 그럼 일단 언니 아는 집에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자 해서 언니를 따라갔다. 그 집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집주인이 날 깨워 남동생 집으로 보냈다. 남동생은 나를 데리고 있으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싫어 거리를 두려는 건지 서먹하게 나를 맞이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돌봤는데, 너네 한 번 보겠다고 북송까지 당했었는데 정말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막내 동생과 동생 남편이 찾아와 나는 막내 동생 집으로 가버렸다.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집안에도 못 있고 지하 창고에서 지냈다. 그 지하방에서 몸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자꾸 몸이 붓고 하니 보다 못한 막내도 자수할 것을 권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달만 기다리면 내 발로 떠나 회령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결국 고향엔 5일도 못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보위부에서 날 잡으러 온 것이다. 그때 누가 날 신고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게 탈출을 못하고 끝내 구류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거기서 계호가 얼마나 우리를 구박 주는지 고생을 많이 했다. 벌도 많이 받았지만 욕먹는 건 일상이었다. 계호들은 뽐뿌(앉았다 서기) 몇 백 개를 시키거나 인간으로서 듣지 못할 쌍욕에 폭행도 일삼았다.
나는 여기 와서도 줄곧 호송 열차에서 도망쳤던 일을 감춰 왔었다. 그간 아무한테도 하지 못한 얘기였다. 중국에 있는 우리 남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친구에게도 입이 안 떨어졌다. 한국 땅에 와서 국정원에서 그렇게 힘든 조사를 받아도 이 말은 안 했다.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동생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나를 괴롭게 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때 나를 신고한 사람이 동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를 그렇게 쫓아내 버리지 않았으면, 내가 탈출하게 도움만 줬으면, 그래서 빨리 중국에 건너왔으면 내가 그 세월을 고생 안 했을 걸. 이런 거 다 우리 형제 원망이니까 걔네 때문에 나 어떻다는 말을 남한테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결국 나의 수치라 생각했다. 다른 탈북자들이 들으면 네가 똑똑하면 그리 감방 갔겠냐, 그런 소리를 할 거 같고 벌써 와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이제와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찾으면 서로 짐이 될 거 같고 나를 비웃을 거 같고 그런 생각에 남모르게 살고 싶고 그러다 보니 한국에 온 친구들을 찾지도 않게 됐다.
구류장에서 들어간 지 네 달쯤 되었을 때 계호들이 나를 포함해 남자 둘 여자 셋을 수갑 채워서 무슨 큰 회관으로 데리고 갔다. 회관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이 나한테 앞으로 나오라 해서 날 소개하는데 거기 앉아 구경하는 북한여자들이 저 년은 중국에 애까지 데리고 갔다고 그러면서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 큰 회관에서 우리한테 '저 간나, 죽일 것들' 하면서 욕하는데 그 심정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몇 백 명이 모인 공개재판에서 우리를 수갑까지 채워가지고 세워 놓고 우리를 보는 혐오와 증오가 가득 찬 눈초리들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죽고 싶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고 분노에 치가 떨렸다. 그 인간들은 그렇게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너네들은 얼마나 잘 살길래 그렇게 하는가 싶고 정말 증오스러웠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먹고살려고 탈북했지 나라가 잘 살았으면 우리도 탈북 안 하지 않았겠냐 하는 생각에 진짜 분통하고 저주스러웠다. 한 명 한 명 죄목을 읊고 변호랄 것도 없는 재판 끝에 5년이라는 판결이 떨어졌다. 나랑 같이 서 있던 애들이 막 울기 시작했다. 그 세월을 어떻게 견디느냐고 옆에서 그렇게 서럽게 우는데도 나는 눈물이 안 났다. 내가 죽어도 내명이고 살아도 내명이겠지 걔네들한테 내가 그렇게 말해줬다. 재판이 다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에 구류장에 앉아 가만히 생각하니 5년 세월을 보낸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1년도 힘든데, 6개월 단련대도 힘들었는데 과연 5년을 이겨낼까 하니까 나도 눈물이 났다.
한 겨울에 구류장을 떠나 교화소로 가는데 신발이라고 북한 얇은 천 신발을 신고 널빤지 같은 울퉁불퉁한데 그런 데 앉아서 실려 갔다. 떠나기 전까지 내심 면회 오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동생들도 못 보고 떠났다. 그때 그 기억으로 고향에 대한 좋은 감정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남들은 통일되면 간다고 하는데 그래 남들 다 가도 난 고향에 갈 생각이 없다. 가고 싶지 않다. 정말 아픈 상처밖에 없다.
*보안서 : 북한의 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