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지는 것이다_02
처음 북송되고 나서 중국에 있는 남편이랑 통화를 하려고 국경지대에 갔을 때였다. 중국과 전파가 통하게 하려면 두만강 기슭으로 가야하는데 그러려면 회령(함경북도 두만강 인근 국경지역)에서 이틀은 도보로 걸어야 했다. 도착해서 브로커 집에서 하루 자는데 거기 농장 작업반장이라는 인간이 와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우린 이렇게 저렇게 왔다 둘러댔는데도 곧 국경경비대가 들이닥쳐서 숙박등록을 했냐고 시비를 걸었다. 우리가 숙박등록이 없으니까 국경경비대 본부로 연행시켜 검문을 했다. 그런데 일행의 짐에서 전화기 배터리가 나왔다. 미리 치웠어야 될 걸 그 땐 당황해서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이다. 그 다음 우리를 묶어놓고 조사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포승을 그냥 한 명씩 따로 묶으면 모르겠는데 둘 씩 손목을 같이 묶어놔서 옆 사람이 움직이면 얼마나 아프던지 그 고통이 정말 잊히지가 않는다. 그 추운 날씨에 밤새 얼마나 추웠는지 그 땐 정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런 생각만 났다. 그날 밤 그 포승줄에 손목이 쓸려 멍이 들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도 잊을만하면 그 때가 자꾸 악몽처럼 떠오른다. 밤 열시에 체포돼가지고 밤새 묶여 있다가 다음날 아침 아홉신가 열시나 되어서야 포승을 풀어줬다. 그리고 우리는 창고 같은 데 갇혀서 밥도 굶고 보위부에서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변변한 경찰차도 아니고 무슨 장사꾼들 밀수하는 화물차 같은 게 나를 데리러 왔고 보위부 사람들은 다시 나를 묶고 그 채로 차에 태웠다. 정말 얼마나 쪽팔리고 수치스러운지 진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보위부에 이관돼서 조사를 40일 받고서 6개월 두 번째 단련대 처분을 받은 것이다. 북한 사람이래도 그렇게 고생한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힘들게는 살았어도 법 운운하면서 그렇게 가혹하게 인권을 유린당하는 것은 못 겪어봤을 거다. 우리가 잡혔던 11월 30일은 머리에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구류장이랑 교화소에선 내가 살아야겠다, 내가 살아야만 너네한테 복수할 수 있고 내가 죽으면 지는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매일을 버텼다.
단련대에 두 번째로 들어갔을 때였다. 교화소에서 부종이 생겨서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그 배가 띵띵하고 숨이 차는데도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나무를 해야 했다. 제일 힘들고 무서운 날은 비 오고 눈 오는 날이었다. 그때는 정말 어떻게 그리 살았는지 비를 맞아 다 젖어 감기가 와 몸이 떨려도 일해야 했고, 눈 오는 날은 마당이고 어디고 눈을 치워 온 군의 길목까지 다 열어야 했다. 난 두 차례 겨울을 단련대에서 났는데 거긴 북방 추운 지방이니까 2월이나 3월에도 상하수관들이 자꾸 얼어서 그 관을 깨야 했다. 관이 잘못 터져 물이 나오면 그 지도원 새끼들이 무조건 거기 물에 들어가라고 걷어차면서 개간나 무조건 하라고 윽박질렀다. 우린 인간 취급도 못 받았다. 그 겨울에 신발이 조금만 젖어도 발이 시린데 맨발 벗고 들어가서 곡괭이질을 하니 다리가 짜릿짜릿하고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들어가라 하면 즉각 들어갔다가 추워서 나왔다가 또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고 그랬다. 처음에는 아리는 게 나중에는 감각이 없었다. 물에 한참 있다 나오면 밖에도 추우니 바지를 올리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부었다. 붓기가 내리면 죽는다는데 나는 세 번 부었는데도 명이 긴지 죽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견뎠을까 싶은데 그런데서 우리가 병이 많이 오는 것 같다. 여기 와서 들어보니 삼청교육대가 딱 그렇던 것 같은데 그래도 한국은 그 끔찍한 것들 다 지나가 괜찮지 북한은 지금도 그 체계이니……. 북한은 언제 그렇게 되겠는지.
정말 단련대에서 한 것을 생각하면 북한에 있을 때처럼만 일하면 한국에 와서도 잘 살 거다. 단련대에서는 새벽 5시부터 깨워 아침 7시까지 식전 작업을 하고 아침밥을 30분 안에 먹고 휴식은 무슨, 시멘트 차가 들어온다 하면 점심시간에도 뛰어나가야 했다. 시멘트 실은 대형차들이 오면 50킬로씩, 둘이 100킬로를 담가에 들고 뛰었다. 절대 걸으면 안 됐다. 젊었을 때 삼십 대에 들어갔을 때는 한 마지기를 멜 수 있었는데 나이 사십 지나서 다시 하려고 하니 고꾸라지고 또 고꾸라졌다. 그 시멘트 먼지가 몸에 옷에 얼굴에도 뽀얗게 앉아 붙어 털어도 안 지워졌다. 그런 시설에서 일 시킨다 하면 여기 한국 사람들은 사람 잡는다고 할 걸, 우린 인권이 뭐야 식전작업, 야간작업 계획량을 못 마치면 야간에 횃불 같은 걸 켜 두고라도 끝내 놓아야 했다. 일요일에 좀 쉬는 거 같으면 군 간부들이 자기 집에 불러 동네 똥개 부리듯 짐승 취급을 하며 일을 시켰다. 그들에게 단련대생들은 마음대로 이용하고 부려먹을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단련대 내 도난 사건이 생기면 범인이 나올 때까지 온 밤 잠도 안 재우고 난로도 없는 감방에서 김정일이 썼다는 당 지도 체제 10대 원칙을 외우게 했다. 삼일 동안 자지 못해서 정신이 희박해져도 그 다음 날 나가 또 일했다.
한 번은 도난사건이 나서 범인을 잡는다고 이틀 밤을 잠도 안 재우고 밖에 나가서 나무를 패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밤에 잠도 못 자는데 낮에는 낮대로 일하니 스물 몇 명 되는 여자들이 멀쩡하게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도둑질 했다고 거짓 자수를 했다. 어떻게든 살아야 되겠어서 내가 누명을 쓰는 대신 거기서 벗어났다. 그래서 그 숱한 여자들 다 살았다. 그래도 도둑으로 됐으니 구박은 받았는데 나중에 출소할 때 보니 내가 진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내가 거짓 자백을 안 했으면 나이 먹은 사람, 젊은 애들도 있는데 밤새 우리가 자지도 못하고 그 고생을 더 할 수가 없었을 거다.
그런 시절 6개월을, 그러니까 합치면 1년을 했다. 수감자들이 영양실조에 많이 걸려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가족들한테 단련대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고, 면회를 많이 와서 음식을 넣어줬기 때문에 영양실조는 없었다.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면 거기서 죽을 까봐 퇴소를 시킨다. 또 관리인들은 단련대생 중 남자를 하나 골라 조장을 시켜 다른 수감자들을 감시하고 때리게 한다. 조장이 일을 잘 못한다고 남자 여자 따지지 않고 수감생들을 발로 걷어차면 관리원들은 잘한다고 조장을 부추기곤 했다. 멀리 가서 작업을 하게 되면 그 곳에서 밥을 먹고, 단련대 주변에서 일하게 되면 단련대에 들어와서 밥을 먹었다. 줄지어 나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이때에도 사람들의 노래 소리가 맞지 않으면 구보를 시켰다.
나는 6개월의 단련대 생활을 마치고 북한에 있는 동생 집으로 갔다. 나는 거기서 중국의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고, 브로커의 도움으로 두만강을 다시 건넜다. 그 당시 국경 경비가 심한 때라 도강비로 중국 돈 4천 위안(한화 약 67만원)을 줘야했다. 브로커가 매수한 군인이 문을 열어줬고 브로커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그렇게 다시 남편과 자식들이 있는 중국집으로 돌아갔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깐, 탈북한지 2년째 되던 해에 연길을 방문했고 머물렀던 집의 중국인 주인에게 문제가 생겨서 나도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나는 가짜 중국 신분증을 가지고 있어서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같이 갔던 탈북자가 나도 북한사람이라 불면서 다시 체포되어 그 해 여름, 북한으로 다시 끌려갔다.
연길 공안에서 20일을 지낸 후 국경 지대의 구류장에 넘겨졌을 때였다. 구류장은 화장실만한 방에 사람이 숱하게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가 누워서 잔 핏자국 있는 옛날 돗자리 같은 것이 깔려 있고 창문도 달아날까봐 쬐끄맣게 만들어 놓았다. 문은 바닥에 조그맣게 개나 지나갈만한 문처럼 아궁이 불 때는 구멍 만하게 해놨다. 들어갈 때도 기어들어가야 하고 조사받으러 방에서 나올 때는 앞으로 못 나오고 엉치부터 내보내 나와야 했다. 안 그러고 머리부터 나가면 얼굴에 구둣발로 발길질을 했다. 우리 삼촌이 보위부장을 했는데 내가 교화소랑 단련대를 겪어보니 삼촌이 삼촌 같지 않아 보이고 그냥 그런 직급의 인간 같아 보였다.
그 곳 보위부는 악착같았다. 그곳에서 보위부 소속 여군이 나를 알몸 검열을 한 뒤에 그 시멘트 바닥에 앉은 상태로 다리를 벌리라고 했다. 그리고 물동이를 갖다 놓은 뒤에 내 자궁을 조사했고 나는 질 내에 숨겨 두었던 돈을 다 빼앗긴 후 감방에 배치되었다. 이후 나는 집결소로 넘겨졌다. 집결소 군인이 보더니 나더러 임신한 것 같다고 했고, 나도 생리가 없어서 임신한 것 아닌가 했다. 병원 검사에서 임신 3개월이라 하면서 중국 아이를 가졌으니 중절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서 내 뱃속의 세 달된 애를 잃었다. 단지 중국인의 씨라는 이유에서였다. 집결소 소장이 군의사에게 나를 병원에 데려가라 지시했고, 병원 산부인과 의사가 내 배에다 뭔지도 모를 주사를 놓은 후 스물 네 시간이 못 돼서 나는 아이를 낳았다. 그 때 몸조리도 못하고 2-3일을 그 찬데 누워 있다가 그 다음 날부터 그냥 일을 시켰다. 낙태도 출산처럼 몸이 다 풀려 쉬고 돌봐줘야 한다는데, 자기 집 개가 새끼를 낳아도 그런 대우는 안 할 것이다. 내 몸이 다 망가지고 병들기 시작한 건 그렇게 일하고 난 후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임신 중절했다고 말해도 계호들은 자기들 집을 건설한다며 일을 시켰다. 거기서 두 달 있는 동안 밥은 푹 삶은 통강냉이 20알이 전부였다. 그건 건강한 사람들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