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_03
"아버지가 상경하시던 때에는 몇 살이었어요?"
1955년, 18살이 되던 해였지. 멸치잡이 해서 번 돈으로 기차표를 사고, 오래된 잠바와 바지 하나만 책가방에 챙겨서 떠났어. 당시에 아침에 중앙선 기차를 타면 저녁이 돼야 서울에 도착했단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석탄을 때서 기차가 달렸기 때문에, 역에 내리니까 연탄가루로 얼굴이 새까매졌더구나. 대충 소매로 쓱 닦고 말았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단다.
서울에 도착했지만 당장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로 다시 들어갔어. 잠깐 앉아서 쉬었는데 피곤했는지 곧바로 잠이 들었단다. 아침이 돼서 일어나 보니 역사 안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했어. 그제야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남은 돈으로 국수 한 그릇까지 먹고 멍하니 앉았어. 어디서 일할 곳을 구하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했단다.
그렇게 서울 역사 안에서 지낸 지 4일이 지났을 때였어. 갑자기 누가 “야! 너 재근이 아니야?” 라며 아버지에게 다가왔단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 너무 놀라서 뒤돌아봤더니 어떤 영감님이 서 있는 거야. 그 영감님은 울산에서 우리 가족과 집을 거래했던 분인데, 그분이 먼저 나를 알아본 거였지. 영감님이 “너, 왜 여기 있나?”라고 물어보시더구나. 돈을 벌고자 서울까지 왔는데 어디 들어갈 데가 마땅치 않아 역에서 지내고 있다고 얘기했어.
영감님이 잠깐 생각하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편지를 하나 써 줄 테니, 이걸 가지고 서울 경찰국 경무과에 최현재라는 계장을 찾아가 봐”라고 하시는 거야. 당시에는 경찰청을 경찰국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높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시더구나.
"그분을 만날 수 있었나요?"
경찰국에 가서 그분을 찾았더니 정말로 만날 수 있었어. 계장님이 편지를 읽어보더니, “너 우선 당분간 식당에 가서 있어 볼래?”라고 하셨단다. 나는 어디든지 일만 할 수 있다면 무조건 좋다고 대답했지. 그렇게 해서 갔던 곳은 명동에 고려정이라는 불고기 식당이었어.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고 흔적도 없더구나. 식당에서 매일 불판을 물에 불려서 닦는 일을 했는데 깨끗하게 잘한다며 사장님에게 인정도 받았었단다.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남은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해준 거였어. 깨끗한 건 모아두었다가 밥이랑 같이 실컷 먹었단다. 그때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컷 먹었던 때였을 거야. 영업이 끝나고 나면 식당은 전부 빈 방이었기 때문에 따로 집을 구하지 않고도 거기서 지낼 수 있었단다. 식당에서 일하는 동안 먹고사는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지.
"식당에서는 얼마 동안 일을 하신 거예요?"
거의 1년 정도 일했단다. 1년이 지났을 때 즈음 어느 날 경무계장님이 아버지에게 다시 경찰국으로 오라고 하시더구나. 찾아갔더니 이제 식당일은 그만두고, 앞으로 경찰국에서 소사직으로 일을 하라고 하셨단다. 각종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는데, 주로 건물 내부를 청소하는 일을 했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계단부터 사무실까지 청소를 끝냈어야 했지. 월급은 그 당시 돈으로 3,400원을 받았는데, 쌀 한 가마 값이었단다. 그렇게 큰돈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경찰관이 받는 노임과 거의 똑같았어. 소사로 일을 시작하고 나니 돈이 꽤 많이 모였지. 돈을 모으기 시작하니, 늦었지만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때도 교장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셨나요?"
아니. 그때는 아버지가 20살이었는데, 경무계장님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 영감님이 경무계장님한테 처음 나를 소개할 때, 공부를 대단히 하고 싶어 하는 아이라고 말을 했었다는구나. 이 아이 장래를 생각해서 직장을 좀 마련해 주라고 미리 얘기를 했었던 거야. 계장님이 처음 식당일을 소개해주실 때 “좌우간 네가 여기서 조금만 고생하고 있으면 너 공부할 때를 알려주마”라고 하셨어. 하지만 나는 그때 먹고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지.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2~3년은 야간으로 학원을 다니면서 초중등과정을 이수했단다.
이후에는 낮에 경찰국에서 일을 하고, 야간에는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어. 어렸을 때처럼 공부를 해도 내용이 기억에 잘 남지는 않았지만, 평생 배우지 못한 한을 푸는 것 같았단다. 하지만 학교를 다닌 지 3년이 채 안되었을 때,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일을 할 때 기침이 잦았는데, 점점 피를 토할 정도로 심각해졌단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폐가 좋지 않아서 농촌 같은 곳에 가서 밥이랑 약을 잘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하는 거야. 당시에 몇 개월만 학교를 더 다니면 졸업할 수 있었지만, 몸이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어.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울산으로 다시 내려갔단다. 울산에서 쉬는 동안 2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단다. 아무리 공부를 하려 해도 ‘내 운명이 그렇게 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지. 2년이 지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단다.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 경무계장님을 찾아갔지만, 그 사이 강원도로 근무지를 옮기셨더구나. 그래서 나는 ‘앞으로 그분을 다시 뵙기는 어렵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단다. 그런데 누가 계장님에게 내가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는 소식을 전해줬던 모양이야. 그래서 경무계장님은 내가 다른 경찰서에서 소사로 근무할 수 있도록 또 한 번 도움을 주셨단다.
경찰서에서는 7개월 정도 근무를 했어. 그때 노임은 천몇 백 원이었는데, 경찰국에서 근무할 때 보다 절반에 못 미쳤었지. 겨우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단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사는 열심히 장사를 하거나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경찰서 일을 그만두고 성북구 장위동으로 이사를 갔단다.
"이사한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결혼 생활을 시작했단다. 아버지가 경찰국에서 일을 할 때 지하실에 조그만 다방이 있었어. 아버지는 그곳에서 너의 엄마를 만났단다. 아버지가 늦게까지 공부를 하면 차도 한잔씩 가져다주고 참 따뜻한 사람이었어.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고 정이 갔단다. 장위동으로 이사 간 뒤에도 너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 경찰국에 자주 가곤 했었지. 너의 엄마를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었어. 그렇게 만남을 이어오다 우리는 결혼을 했고, 장위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물처럼 네가 우리에게 찾아왔어. 엄마와 나는 너를 만날 생각에 너무 기뻐서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지. 그런데 네가 태어날 날을 앞두고, 아버지는 군대 입영 통지를 받게 되었단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떻게든 미뤄보려 했지만. 결국 입대를 했고, 엄마는 혼자서 출산을 하게 됐어. 군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후유증으로 힘들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상관에게 보고한 이후에 바로 집으로 갔지만 엄마는 너무나 위독한 상황이었어. 결국 너의 엄마는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고,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버지가 엄마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병이 났다고 생각하니 한이 맺혀서 눈물 밖에 나지 않더구나. 아직 엄마 젖도 채 떼지 못한 너는 아무리 안아서 달래주어도 배가 고파 우는 날이 더 많았단다. 보리쌀이라도 물에 삶아서 먹여봤지만 전혀 입을 대지 못했어. 배가 고파서 계속 울고 있으니, 이웃에 있는 아주머니들이 젖을 먹여주었단다. 그제야 꼼짝 않고 하루 종일 곤히 잠을 자던 너를 바라보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구나.
나는 어떻게든 너를 살리고, 너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단다. 아직 핏덩이인 너를 키우기 위해서 아버지는 당장 돈을 모아야 했어. 그래서 군에 다시 입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단다. 군인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는 일은 멀리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는 일이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 위에서 살아야 했단다.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너를 대신해서 키워주겠다는 분을 만나게 되었고, 돈을 많이 벌어서 꼭 갚을 테니 너를 잘 키워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단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꼭 너를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한 뒤 아버지는 배를 타러 갔어.
너를 한시라도 빨리 찾기 위해 아버지는 원양 어선을 타기로 결정했단다. 원양어선은 1년 내내 외국 해역까지 가서 고기를 잡고, 한 달 동안 육지에 잠깐 머물렀다가 또다시 1년을 바다에 나가기를 반복하는 일이었단다. 일이 고된 만큼 빠른 시간에 목돈을 벌 수 있었어. 고된 일이다 보니 보통은 2년을 연속해서 일하고 몇 년을 쉬지만, 아버지는 너를 빨리 찾기 위해 쉬지 않고 8년 동안 일했단다.
아버지는 육지에 잠깐 들어올 때마다, 멀리서 너의 모습을 보곤 했어.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던 어린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갑자기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어린 나이의 네가 혼란스러울까 봐 직접 나서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볼 수밖에 없었단다. 당시에 자동차가 있는 집은 많지 않았는데, 누군가 너를 차로 학교에 태워다주는 모습을 보고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어. 너를 다시 만날 날도 머지않을 것이라 기대하며 고된 일들을 참아내고, 힘든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