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당 정치학교_05
"아버지와 남겨진 선원들은 어디로 갔나요?"
그 해 겨울, 남아있던 8명은 모두 *중앙당 정치학교라는 곳으로 보내졌단다. 정치학교는 남한으로 보낼 공작원을 훈련시키는 양성소였어. 한 마디로 간첩 교육원이었지. 납치된 선원들 중에서 말을 잘 못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은 모두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젊고 건강한 사람만 뽑아낸 거였지.
도착해서 보니 아치형으로 된 정문입구에 정치학교라는 간판이 있었어. 일반 학교처럼 건물이 있지 않고 산속에 여러 채가 흩어져있었는데 산 전체가 정치학교였지. 외부인들은 전혀 접근할 수 없도록 주변은 모두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외부인이 들어오면 총으로 쏴서 죽였단다. 교육생은 400명 정도가 있었는데,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있었어. 어린아이들도 있었는데,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는 **꽃제비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술을 가르쳐서 적국에 보냈었지. 그런 아이들이 한국에 넘어가면 먼저 가있는 공작원들한테 돈을 보태주기도 했단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우리 선원들을 모두 다른 호실에 배치를 했어. 아버지는 1호실로 배치를 받아서 들어갔는데,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나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단다. 뭔가를 태운 것 같은 냄새였어.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나쁜 냄새였지. 호실로 배치받은 이후에는 우리가 입고 있던 파란 옷은 다 벗기고 북한 군복을 입도록 했단다. 그다음에 안경, 모자, 마스크, 우산을 하나씩 주더니 바깥에 나갈 때는 무조건 이걸 다 써야 나갈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밖에 나가면 서로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단다. 학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병원이나 일반 사회에 나갈 때도 모두 뒤집어쓰지 않으면 외출을 못하게 했지. 학교 밖 사람들하고 말을 섞으면 바로 윗사람들한테 불려 갔단다. “오늘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를 했냐,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당중앙위원회에 바로 보고하겠다.” 라며 협박을 했지. 잘못 걸려서 당에서 처리하라고 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거였단다.
"거기서는 어떤 교육을 받으셨어요?"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청소를 하고, 오전부터 오후까지는 매일 강연을 들어야 했단다. 북한이 얼마나 우월한지, 사회주의가 왜 좋은지에 대한 내용이었어. 강연장은 4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는데, 앞에는 교탁이 하나 있고 조별로 지정된 칸에 들어가서 수업을 듣게 했단다. 그 칸에 들어가면 옆에 누가 앉았는지 전혀 볼 수가 없도록 되어있었어. 선생만 학생들을 볼 수 있는 구조였지. 교육이 끝나면 바로 과제를 시작했어. 위대한 수령님 ***회상기를 읽고 요약문을 작성해야 했는데, 그렇게 매일 오후 시간을 보냈단다.
저녁을 먹고 7시가 되면 체력 훈련이 이어졌단다. 훈련을 받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했어. 배낭 25개에 모래를 가득 담아서 그걸 한꺼번에 짊어지고 300리를 걷는 훈련을 매일 했어.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을 걸어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단다. 매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훈련까지 마쳐야 하루 일정이 마무리됐단다.
매일 일상적으로 받는 훈련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특수 훈련들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도 많았지. 북한 위쪽 지방은 11월 즈음이 되면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데, 그 시기에 청진까지 교육생들을 데려갔단다. 청진 앞바다에 도착하면 보트가 여러 대 대기하고 있었어. 보트를 타고 빠른 속도로 10분만 이동하면 육지가 아득할 정도로 바다 한가운데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부터 육지까지 헤엄쳐서 돌아오는 훈련이었단다. 적어도 20시간을 수영해야 육지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10시간 정도가 넘어가면 힘이 빠지고 손이 잘 움직이질 않았어. 그 훈련을 하면서 죽는 사람이 정말로 많았는데, 한 번 훈련을 다녀오면 최소 10명은 죽고 말았지. 사람 목숨을 잃었는데도, 간부들은 욕하면서 “당비가 얼마나 들어가면서 이걸 키웠는데, 이놈 새끼들이 그걸 따라 주지도 않고 죽었냐.”라고 막 욕을 하더구나. 사람 목숨보다 돈을 더 아깝게 생각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었지.
교육생들끼리 격투를 붙였는데, 급소를 잘못 가격해 죽기도 했고, 잠복훈련도 목숨을 걸고 했단다. 밤이 되면 교육생들을 모두 불렀는데, 지도에 있는 묘지를 가리키면서 “남쪽으로 백보 가면 소나무가 많은 곳이 있는데, 여기다가 진지를 꾸려라”라고 명령을 했어. 그럼 배낭에 모래를 가득 담아서 묘지를 찾아갔지. 도착해서는 땅굴을 파고 가져간 모래를 덮어 무덤 모양을 만들었어. 그 속으로 들어가서 10일 정도는 꼼짝 않고 숨어있었단다. 땅굴 안에 들어가 있으면 무서워서 잠이 오질 않았어. 숨 쉬는 구멍 하나만 겨우 내놓고 숨만 쉬었지. 식량을 넉넉히 챙겨 오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배가 고파서 못 나오고 죽는 사람도 있었단다. 잠복 훈련을 할 때는 권총이랑 탄환을 챙겨 가는데, 그때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이걸로 죽을까 생각을 하다가도,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
"정치학교 교육 중 가장 기억나는 내용 있으세요?"
어느 날은 김일성이 정치학교를 방문했어. 그때 김일성이 남한을 어떻게 분열시킬지, 남한 사람들을 어떻게 포섭할지 전략을 이야기했지.
“남조선의 중‧하층 장교들 중에는 직위 불만자들이 많은데 그 대부분이 비 육사출신이며 또 육사출신들 가운데서도 타 지역 출신 장교들은 경상도 출신들에게 밀리어 소외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출신지역과 육사와 비육사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혁명의 편으로 끌어당기자!”라는 군 장교들에 대한 내용도 있었고, “남조선에는 행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합격만 되면 고위공무원으로 각 정부부처에 잠입해 들어갈 수 있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을 남파하여 정부에 잠입시켜라!”라고 하며 다양한 교시를 내렸단다.
아버지는 그 당시 정치학교에서 한창 훈련을 받고 있었다 보니 이러한 전략들로 대한민국이 분열되지는 않을까, 북한에 넘어가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었단다.
"정치학교에서는 얼마 동안 계셨어요?"
원래는 4년을 채우는데, 아버지는 입학한 지 3년 8개월 되었을 때 졸업을 했어. 훈련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간첩으로라도 남한에 가서 널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단다. 일단 간첩으로 넘어가면 바로 자수를 할 생각이었지. 졸업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중앙당 지도원이 찾아와서 나를 보고 “건강과 기술은 좋은데 사상적으로 병이 있다.” 라며 나를 (남한)이 아니라 북한 사회로 내보낸다고 하더구나. 나는 완강하게 대들었지만 소용이 없었지.
알고 보니 아버지가 정치 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에 ****이후락이라는 사람이 북한에 왔었단다. 그 사람이 북한에 와서 서로 총질하지 말자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남한으로 못 가고 북한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거야. 아버지는 중앙당에서 내리는 처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정치학교를 졸업하는 날 아침에 나가보니 책상 위에 종이가 쫙 놓여있었어. 중앙당 간부들이 우리 선원들에게 종이에 모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단다. “갑자기 무슨 지장을 찍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니까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북한에 납치되어 왔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종이였어. 그럼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물어보니까, 위대한 수령님 정치가 좋아서 자진해서 입북했다고 말하라고 했단다. 말조심하지 않으면 당신네들은 우리하고 인연이 끝난다며 협박을 했어. 앞으로 신변을 보호해주지 않겠다는 말이었지. 결국 우리 선원들은 서약서에 열 손가락 모두 지장을 찍고 정치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단다.
*중앙당 정치학교 : 북한에서 대남공작원 전문양성기관을 대체할 대남공작요원 교육 훈련 기관을 신설하고자 1957년 1월 30일 김일성고급당학교 분교 형식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학교’(약칭 정치학교)를 창설함. 한마디로 ‘대남공작원 양성소’ 임. 1970년대 중반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80년 초에는 ‘노동당중앙위원회 직속 정치학교’, 1990년대 초에는 현재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명됨.
**꽃제비 : 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거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아이들을 이르는 말
***수령님 회상기 : ‘회상기’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물들의 빨치산 활동에 관한 경험담임. 당시 빨치산들의 적이었던 일제에 대한 증오감, 배고픔, 고난 등을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으로 극복한다는 것이 ‘회상기’가 전하는 메시지임.
****이후락 :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1972년 5월 2일,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하였음. 5월 4일 새벽, 김일성과의 사상 초유의 남북 비밀회 담을 가졌음. 남북한 당사자가 강대국에 대한 공동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협의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음. 귀국 후 북한 측의 답방이 이루어졌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