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_07
"북한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셨나요?"
1976년, 함주 공장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단다. 어느 날 함주군 병원 과장이 나에게 다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더구나. 당시에 나는 마흔을 곧 앞두고 있었어. 병원 과장은 함주군 당비서를 통해 아버지에게 여자를 소개해줬단다. 처음 만났던 여자는 당원 사람이었는데, 토대가 좋은 집 여자라며 소개해줬어. 그런데 당원이라 그런지,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지. 그래서 함주군 당비서에게 저 사람하고는 결혼을 못하겠다고 하니까 “이놈 새끼, 너 내가 함주군 초급당 조직비서로 있을 때까지 너 장가는 다 갔어!”라고 화를 내는 거야. 토대도 안 좋은 놈이 성분 좋은 집안을 거절했다고 괘씸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도 병원 과장은 착해서 계속 다른 사람을 소개해줬지만, 마음이 쉽게 가지 않았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빨리 결혼해야 한다며 병원 과장이 마지막으로 한 명을 소개해줬단다.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 김송이란다. 아내는 담배공장에서 일하던 종업원이었는데,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고향이 어딘지 물어봤더니 울산이라고 하는 거야. 북한에 있는 사람이 고향이 남한인 것도 놀랐는데, 나와 같은 울산이라기에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단다.
"아내 분은 어떻게 북한으로 오시게 된 건가요?"
1940년대 초, 아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내의 가족은 다 함께 중국 하얼빈으로 이민을 갔어. 중국에서 계속 살다가 아내가 18살 때,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는데 모택동이 밤낮으로 사람들을 죽여서 수백만 명을 처참하게 학살하던 시기였지. 당시 북한에서는 중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북한으로 오면 최고로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며 학생들을 데려가려고 했었단다. 당시에 북한은 6·25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어. 그래서 아내는 북한에서 온 선전대의 말에 현혹돼서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부를 더하기 위해 북한에 갔단다. 아내한테 북한은 오빠와 남동생이 전쟁으로 죽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아내는 북한에 왔지만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고, 통조림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일을 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담배공장으로 옮겨 10년 넘도록 쉬지 않고 일을 했지.
나는 아내와 얘기를 할수록 무척 가깝게 느껴졌단다. 그래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와 나는 결혼하겠다고 당에 보고를 했지. 그런데 다음날 초급당에서 사람이 찾아오더니 아내하고 결혼할 수 없다고 통보를 했단다. 왜 안 되는지 물어보니까 “여기서는 자기가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당에 지시를 받는 조건하에서 할 수 있다.”라고 하더구나. 병원 과장은 “이전에 그 당원 여자를 거절한 것도 있고 해서 그러는 모양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야. 그래도 아버지는 병원 과장에게 나는 꼭 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얘기했고, 아내도 나에게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려보자고 했어.
"당에서 결혼을 반대했는데, 어떻게 결혼할 수 있으셨어요?"
다행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허락을 받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당비서가 다른 곳으로 부서를 이동했던 거였지. 그래서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너의 이복동생인 정태가 태어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결혼하고 1년 동안은 아내와 한 집에서 함께 살 수 없었어. 아내는 일하던 담배공장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도 전동기 공장 합숙소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지. 1년 후에 당에서 10평이 채 되지 않는 집을 구해줬는데, 아이를 함께 키우기에는 좁은 곳이었어. 다른 사람에게는 20평 정도 되는 집을 줬는데, 아버지는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일 작은 집을 줬었지.
그래서 나는 3년 동안 돈을 모아서 당시 북한 돈 500원을 주고 공장 앞에 조그마한 집을 샀단다. 집을 마련하긴 했지만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기존 집은 허물고 매일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벽돌, 나무 건축 자재들을 리어카에 싣고 가지고 와서 직접 집을 다시 지었단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더구나.
결혼한 이후에 아내와 내가 아무리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도 받는 돈은 70원이었는데, 가족이 함께 먹고 살기에는 부족했단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처음에는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고기 잡는 일이더구나. 그래서 나일론으로 된 약한 실을 구해다가 그물을 만들기 시작했어. 바다에 웬만한 고기는 다 걸리게끔 촘촘하게 만들었지. 그물 하나를 만드는데 거의 넉 달이 걸렸단다. 잡은 고기로 돼지를 사서 식량을 구할 생각이었어. 그 당시에 200kg 되는 돼지를 팔면, 식량을 400kg이나 받을 수가 있었단다. 세 식구가 일 년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지.
고기들이 많이 잡히면 시장에 팔아서 돈을 벌기도 했단다. 하지만 나를 감시하던 놈들한테 금방 들통이 났어. 북한은 참게가 상당히 맛이 좋았는데, 철사를 구부려서 그물을 달고, 가운데 선을 하나 내서 미끼를 달면, 게들이 와서 미끼를 먹느라고 야단이었지. 10분에 한 번 그물을 끌어올려보면 게가 철인 시기에는 300~400마리씩 잡히곤 했어. 잡힌 게를 장마당에 가져다가 조금 팔았는데, 시장 감찰원이 고발해서 군당까지 불려 가서 조사를 받았단다. 군당 조직 비서가 “당원이라는 사람이 게를 잡아서 반찬 하는 건 좋다. 그런데 돈벌이를 한단 말이야? 돈벌이 얼마나 했어?” 하면서 대단히 욕을 먹었지. 앞으로 절대 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자술서를 써서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