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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항해

고난의 행군_08

by NKDBer

"북한에서의 생활은 이후에 괜찮아지셨어요?"

점점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단다. 1970년대 중반에 아버지가 북한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상점에 가면 이것저것 파는 것이 많았어. 몇 년이 지나서 보니까 상점에 물건들이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물건들을 한꺼번에 사 가길래, “왜 그렇게 물건을 많이 사갑니까?” 물어보니까 “이거 앞으로 없어지니까 집에 사둬야 합니다.”라고 하더라고. 정말로 어느샌가 물건들이 하나둘씩 없어지고 옷, 신발 이런 것까지 싹 사라져서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어. 1980년대 초에 경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1994년 김일성이 죽은 이후, 북한은 최악의 식량난으로 불리는 ‘고난의 행군’ 시기가 시작됐단다. 국가의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졌기 때문에 정부는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배급도 전혀 주지 않았어.


김일성이 죽은 날, 안전원이 길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면서 상이 났다고 알리더구나. 나는 그때 고기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단다. 그날 저녁, 안전원들은 공장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위대한 수령님을 추모한다며 시체도 없이 이름만 써놓은 곳에 절을 하게 했어. 나는 남한에서처럼 고개만 가볍게 숙이고 나왔는데 보안원들이 내 옆에서 나를 뚫어지게 관찰하더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길을 가로막더니 “여기 서!” 하면서 나를 따로 불렀어. 멀리 떨어진 방으로 데려가서 머리를 한 대 쥐어박더니 “이 새끼 위대한 수령님이 서거했는데 눈물도 안 나오데?” 라며 왜 울지 않느냐고 협박을 했단다. 20일 동안 추모를 하게 했는데, 매일 억지로라도 눈물을 나오게 했어야 했지. 다른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되면 손에 침을 바르고 눈을 비벼서 빨갛게 만든 후에 보안원들의 감시를 통과했단다.


수령참배.png


이 시기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해서 굶어 죽었어. 특히 먹을거리가 동나는 봄은 심각했는데, 일주일도 넘게 굶으니 사람 똥이 과자, 빵으로 보일 정도였지. 사과나무에 핀 꽃부터 강아지 사체까지 안 먹은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기차역에서도 굶어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단다. 국경 가까이로 이동하려면 한 달씩 걸리기도 했는데, 식량을 미처 챙겨 오지 못해서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어.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역에 도착해서 시체를 끌고 내려와 묻었단다. 심지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사람을 잡아먹다가 체포되는 걸 본 적도 있었지. 젊은 날 당 간부를 지낸 사람의 집에 안전원들이 들이닥쳐서 윽박을 지르고, 사람들이 모여서 우성 대고 있었어. 그 집 부엌에 김이 펄펄 나는 솥이 있기에 뚜껑을 열어봤는데, 사람 머리가 끓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 전직 당 간부인데도 오래 굶어서 꽃제비를 잡아먹었는데, 정말 비참했지.


고난의 행군 이후로 나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는데, 간이 점점 굳어지는 병이 생겼단다. 아내는 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무릅쓰고 중국 친척집까지 갔다 왔어.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구해 온 약을 먹어도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단다. 전동기 공장에서는 더 이상 일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관리하고 있던 양수장으로 근무지를 이동했어. 양수장을 관리하고 경비 서는 정도의 일이라 일의 강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배급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시작했단다. 하루는 공장을 쉬는 날에 구두 수리가 들어왔는데, 신발 가죽을 기우다가 바늘이 왼쪽 검지 손가락을 관통해 뼈를 건드렸어. 뼈에 염증이 생겨 금방 손가락이 빨갛게 변하고 부어올랐지. 곧바로 병원에 갔지만 손가락을 절단해야 더 이상 세균이 퍼지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하더구나. 당시 북한 의료 환경은 매우 열악했는데 수술할 때 필요한 마취 주사나 진통제를 구하기가 힘들었어. 의사는 마취 없이 나에게 수술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봤지. ‘팔목 하나 없이 살 바에 손가락 하나 없이 살겠다’라는 마음으로 수술을 하겠다고 했단다. 이를 악 물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았단다. 의사가 “이야, 아저씨 정말 독종입니다.”라고 하더구나. 수술을 하지 않으면 손목, 팔까지 다 잘랐을지 모르는데, 그걸 생각해서 견뎠지 아니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거다.


손가락 수술.png


수술을 하고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손에 붕대를 감은 채로 군당 조직비서를 찾아갔단다. “내가 수술을 했는데 마취 주사 하나 없이 생살을 자르느라 피눈물이 났으니 약 좀 구해달라.”라고 하니까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구나. 당비서는 “내가 사람 한 명 보내겠으니까 빨리 나을 수 있는 약 좀 이 사람에게 주라.”라고 했단다. 당비서가 가르쳐준 곳은 약품이 꽉 차 있는 어떤 창고였어. 분명 병원에서는 약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디서 약이 그렇게 많은지 주사도 있고, 먹는 약부터 별의별 약이 다 있었지. 이 약들도 병원 사람들이 처방한다고 가져가서 시장에 팔아먹는다고 하더구나. 이렇게 많은 약들을 당비서를 통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이 정말 비참하게 느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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