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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항해

탈북_09

by NKDBer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탈북을 결심하시게 되셨어요?"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환갑이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북한에 납치돼 온지도 30년의 세월이 흘렀더구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는 정태 때문이었단다. 남한에 두고 온 너를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지. 그리고 네 이복동생인 정태에게까지 대물림되는 차별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단다. 비록 정태가 어릴 때는 북한에서 자랐지만, 이렇게 일평생을 북한에서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정태는 반에서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에 갈 수가 없었단다. 북한에서는 모집지도원의 허가를 받아야 대학 원서를 쓸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남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원서 자체도 써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 아버지는 매년 지도원한테 찾아가서 사정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매번 안 된다는 말뿐이었지. 그렇게 5년을 반복하다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어. “나도 같은 당원인데 왜 우리 아들은 공부 못 시키나? 나는 꼭 우리 아들 대학 보내야겠다.”라고 소리치며 항의를 하니까 지도원이 한 가지 제안을 하더구나. 석탄대학이나 광석대학을 갈 수 있는데, 이 중에서 선택을 하면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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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정태에게 물어봤단다. “아버지, 그 사람들한테 뭘 바랍니까? 말이 대학이지 내가 거기서 4~5년 공부하고 평생 탄광에 들어가서 일할 바에야 뭐 하러 거기 가겠는가?”라고 하는 거야. 지금은 공부할 때가 아닌 것 같다며 결국 대학 가기를 포기했단다. 정태는 대학에 가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바로 함주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어. 그래도 기술이 있으면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작업반에서 철 깎는 기계를 배우도록 견습을 받았어.


그렇게 1년이 지났지만, 한창 젊은 나이의 아들을 계속 공장에서 일하도록 둘 수가 없었단다. 사람이 뭐든 배워야 앞뒤를 가리고 생각을 하는데, 교육받지 않고 마음대로 자라면 나무막대기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어. 자식에게 교육을 시켜주지 못하면 부모로서 한 일이 없고 자격이 없다는 마음이 들었지. 그래서 아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단다.

납치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30년 넘게 살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외부 정보가 차단된 채로 북한에서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북한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어. 남한에는 신문사가 수십 곳이 있지만, 북한에서는 오직 노동당 신문을 통해서만 외부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단다. 매일 북한 정부가 잘한 이야기만 하니까 내 생각도 그렇게 따라갔던 거였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주위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해도 전국적으로 몇 십만 명까지 죽었다는 건 전혀 알 수가 없었어. 위대한 수령님이 연구한 내용, 당 정책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등 모두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내용뿐이었지. 당시에 대한민국이 엄청난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도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리비아에 다녀온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 해외에서는 북한과 달리 돈이 정말 흔하고, 내가 돈을 조금밖에 가져오지 못했지만 거기서 번 돈을 다 가져왔다면 북한에 와서 땅도 사고 집도 다 살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북한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니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용이 없다며, 북한의 제도를 막 비판을 했단다. 북한에 나가기만 하면 마음껏 돈을 벌어 쓰기도 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을 나가기만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 이제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는 마음이 들었어.


"가족이 다 함께 탈북을 하신 건가요?"


중국에 있는 아내의 친척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아내와 아들이 한 달 먼저 출발했단다. 나는 정태에게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든 엄마를 붙들고 둘이 가야 한다. 네가 엄마를 안고 가던가, 업고 가던가 해야 한다.”라고 당부했어. 아내와 아들이 중국으로 출발하고 한 달 정도 뒤에 보위지도원이 나를 찾아왔단다. “내가 아는 사람을 하나 보냈는데, 너희 아주머니랑 아들이 두부 한 덩어리 사가지고 산속에 들어가서 끓여 먹고 중국으로 도망갔다.”라고 하는 거야. 중국으로 잘 들어갔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단다. 나는 지도원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럼 사람을 풀어 붙잡아 와서 총살합시다.”라고 했지. 중국으로 이미 넘어갔다면 다시 잡아오기는 어렵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보위지도원이 “이 새끼, 지아비란 새끼가 어미를 죽이라는 놈이 어디 있나?” 라며 어이없는 표정이었단다. 그래서 나는 “인민공화국 입장에 서면 그렇게 해야지요.”라고 말했어. “아무리 그렇지만 그건 네가 오버하는 거야, 그러지 말고 어떻게 할래?”라고 지도원이 물어봤을 때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어. “내가 직접 가던가, 어떻게든 데려오면 될 거 아니요. 걱정하지 마시오.” 라며 국경 쪽으로 갈 구실을 만들어냈단다. 그래서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조금의 돈과 구두 수리 공구가 담긴 가방 하나만 챙겨서 국경 쪽으로 출발했단다.


"순순히 국경 쪽으로 보내주던가요?"


함주에서 청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한 번 붙잡힐 뻔했단다. 그 당시에는 기차가 자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기차 바깥에까지 사람들이 타곤 했어. 지붕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차표 검열도 잘하지 않았지. 나도 꼭대기에 앉아서 떨어지지 않도록 고리를 붙잡고 가고 있었단다.


청진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정거장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전원들 대여섯 명이 “다 내려와!” 하면서 꼭대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단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내려오기 시작했고,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모두 손을 잡고 한 줄로 서서 움직이게 했어. 앞뒤로 안전원들이 서 있었고, 몇 백 명이 일제히 줄을 서서 안전원 지시에 따라서 이동했단다. 나는 이대로 함주로 돌아가면 다시 나오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 때마침 지나가던 기차가 선로에 정차했고, 안전원들이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를 틈타서 제일 앞 칸에 재빠르게 올라탔단다. 나는 타자마자 기관사에게 북한돈 50원을 내놓고 “아저씨, 내가 가진 돈이 이게 답니다. 이거 받으시고 한 정거장만 태워주세요.”라고 했어. 혹시라도 그 사람이 신고를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단다. 기관장이 나를 가만히 보더니 다행히 옆에 조수에게 나를 기차 뒤쪽에 태워주라고 했단다. 그렇게 뒷칸에 숨어서 한 정거장을 무사히 지났고, 청진에 내릴 수 있었어. 아마 돈 50원이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단다.


청진에 도착했지만, 내 뒤를 밟는 사람이 있었어. 청진 보위지도원이었지. 내가 산으로 올라가서 영변강 꼭대기 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보더구나. 그래서 나는 우리 친척이 국경 쪽 종성에 살고 있는데, 요즘 먹고살기가 힘드니까 가서 구두 수리 해주고 밥도 얻어먹고, 돈도 벌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며 둘러댔어. 그 사람은 뭔가 미심쩍으니까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단다. 가방 안을 보여줬는데 구두 수리하는 공구들 밖에 없으니 당장은 의심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어. 그 뒤에 보위지도원이 다시 나를 쫓아왔지만, 다행히 잘 따돌리고 청진역에서 무사히 기차를 탈 수 있었단다. 기차를 타고 북한과 중국의 국경 지대인 온성군 남양에 도착했어. 이제 강 하나만 건너면 중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지.


강을 건너기 전에 일단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어.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둑어둑 해졌을 때 강변으로 갔단다. 옷은 물에 젖으면 무거워지기 때문에 내의만 가볍게 입고, 구두 수리 공구들도 모두 다 버리고 강에 들어갔지. 보초병들이 100m마다 한 명씩 서 있었는데, 보초병 두 명이 갑자기 양쪽에서 다가오는 거야. 그중 한 명이 내가 물에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게 무슨 소리야? 어느 놈이 하나 넘어간 것 같은데?”라고 하는 거야.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에이, 그냥 가.” 하더니 그 사람을 반대편으로 데리고 갔어.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거기서 바로 붙잡혔을 거야. 내가 강을 건널 때는 8월 말이라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난 상태였어. 하지만 정치 학교에서 했던 수영 훈련과 비교하면 강을 건너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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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 동안 보초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드디어 중국 도문에 도착했어. 근처 농촌 마을에 들어가서 불을 피워 옷을 말리고, 다시 하루 종일 걷다 보니 저녁에는 연길이라는 곳에 이르렀단다. 아내의 친척이 있는 하얼빈 상지 지역까지 가려면 앞으로도 600km는 넘게 이동했어야 했지. 하지만 북한에서 챙겨 온 돈은 거의 다 떨어져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연길의 어떤 정부 건물 앞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한 신사가 나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선생님 말 좀 물읍시다. 여기서 하얼빈 상지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나요?”라고 물었단다. 다행히 그 사람은 조선족이어서 내 말을 알아듣더구나. “걸어서 가게요?”라며 나한테 묻더라고. “그렇습니다. 내가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데, 이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라고 물어보니까 그렇다는 거야.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신사가 멀리서 “아저씨, 아저씨 거기 서요!” 하면서 나를 쫓아오는 거야. 혹시 나를 붙잡아 가는 걸까 봐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어. 신사가 뛰어와서 나를 붙잡더니, “걸어서 가면 몇 달을 걸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이 돈을 가지고 연길 역에 가서 하얼빈까지 갔다가, 하얼빈에서 상지로 갈 수 있는 차를 타세요.”라고 하더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나는 무척 놀랐단다. 그래서 “선생님, 너무 고마워서 언젠가 이 돈을 꼭 갚고 싶은데 이름이라도 하나 적어주세요.” 하니까 그 신사는 “그냥 가세요, 아저씨가 걸어간다고 하니까 너무 마음이 그래서 드리는 겁니다.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세요.”라고 하더구나.


신사가 준 돈으로 연길역까지 택시를 타고 도착했어. 차표도 끊고, 밥 한 끼도 든든히 먹을 수 있었지. 그 신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하얼빈 근처도 가지 못하고 걷다가 굶어 죽었을 거야. 나는 다음 날 새벽에 바로 하얼빈에 도착했고 버스를 한 번 더 타고서 오후에 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단다. 아내는 상지에 도착하면 모아산 운동장 옆에 김철수, 김명옥이라는 사람이 사는 집을 찾으라고 했어. 상지에서도 다행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나 아내가 말해줬던 집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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