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주 사회배치_06
"정치학교에서 나온 뒤에는 어디로 가셨어요?"
아버지는 함경남도 함주군 함주읍에 있는 선박전동기 공장으로 배치되었단다. 그때가 1974년이니까 37살이 되던 해였지. 같이 정치학교를 졸업했던 강병호이라는 친구와 기차를 타고 이동했어. 병호는 함주시로 배치를 받았는데, 북한에 사촌형님이 살고 계신 덕분에 농촌이 아니라 도시로 갈 수 있었어. 병호의 사촌형님은 6·25 전쟁 때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왔는데, 정치학교에 있을 때에도 몇 번 병호를 찾아와서 챙겨주고 갔었다는구나. 기차역에 도착하니 함흥도당에서 준비한 차가 있었단다. 그걸 타고 함흥 국제호텔에 바로 도착할 수 있었어. 호텔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당에서는 먼저 병호를 함주시로 데려다주고,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함주읍 공장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단다.
공장에 도착해서 보니까 단층으로 된 건물들이 많았어. 700명 정도가 일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였지. 아버지가 평양에서 봤던 공장과 비교했을 때는 굉장히 작은 규모였단다. 나를 함주로 데리고 온 중앙당 지도원은 나를 공장 당비서에게로 데려갔어. 우리가 쓰자고 당비를 들여서 교육시킨 사람이니 잘 부탁한다며 나를 소개해주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에서 관리하는 사람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바로 보고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아.
이후에 나는 당비서와 함께 공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합숙소로 이동했단다. 강변 주변으로 쌓아놓은 뚝 근처에 집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지. 남자 숙소는 2곳이었는데, 7명이 한 숙소에서 지냈단다. 첫날 숙소에서 공장 지배인과 함께 저녁을 먹었던 때가 기억이 나는구나. 밥을 한 술 떠서 먹는데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 거야. 벌레가 먹어서 껍데기만 있는 것 같았어. 입김을 불면 밥이 날아갈 정도였단다. 입에 넣으면 가시가 베기는 것 같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지. 결국 몇 숟갈 채 뜨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단다.
아버지를 지켜보던 공장 지배인이 술을 한 잔 따라주면서, 평양이나 정치학교에서 먹고 지낼 때와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얘기를 해주더구나. 보름동안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지만 이러다가는 한국에 가서 너를 보지도 못하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살기 위해 어떻게든 밥을 먹었지.
공장 지배인은 나에게 당장 일을 시작하지 말고, 시내도 돌아다니면서 며칠 쉬라고 했단다. 처음에는 다른 공장 단지를 둘러보기도 하고, 함흥 시내도 걸어 다니면서 구경을 했어. 자전거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오후 2-3시쯤 되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단다. 그런데 누가 감시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어딜 다녔고, 누구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까지 당비서가 모두 알고 있었단다. 아버지가 함주에 도착하기 전에 중앙당 지도원이 “동무가 지방에 내려가면 혼자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 뒤에는 거울이 비추고 있으니까 절대로 장난하지 말고 허튼 생각하지 마라.”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지. 어디 돌아다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숙소에만 있으니까 너무 답답한 거야. 그래서 얼마 쉬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단다. 공장 지배인은 나에게 전동기 부품을 깎는 일을 시켰는데, 처음 6개월 동안은 견습 생활만 했단다. 부품을 0.1mm 라도 잘못 깎으면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기술을 배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
"하루에 근무시간은 어느 정도셨어요?"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가 되면 마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당비서는 시간을 고정해두지 않고 계속 일을 시켰단다. 일요일에도 공장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며 간부들이 압박을 하는데 아주 무서운 놈들이었어. 한 달에 하루라도 쉬면 많이 쉬는 거였지. 일하는 동안 제일 힘들었던 건 공장사람들끼리 매일 총화를 하는 것이었어. 공장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자아 반성을 하고 서로 비판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북한에서는 어느 곳이든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 총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단다. 서로 비판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충성심이 약하다’ 하면서 자기비판을 했어. 하지만 무조건 한 명 이상은 비판하도록 명령했단다. 그야말로 되지도 않는 꼬투리를 잡아야 했지. 대한민국에 와서는 더 이상 총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몰라.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농촌일에 동원되기도 했단다. 아버지는 정치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1년에 한두 달만 일하면 됐지만, 광산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적어도 2~3년 동안 일을 했는데, 노동 강도가 말도 못 했단다.
"사람들마다 동원되는 기간이 달랐나 보네요?"
맞아. 자기가 어떤 출신성분이냐에 따라 달랐어. 북한에는 성분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사회 계급이나 출생 신분에 따라 자신의 ‘성분’이 정해진단다. 이 성분은 52계급으로 나눠지는데, 제일 아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완전히 개보다 못한 삶을 살았어. 집안 가족 중에 북한에 포로로 잡혀온 남한출신 군인이 있거나, 남한에 가서 자수한 가족이 있으면 완전히 천대를 받았지.
그래서 사람들은 출신성분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했단다. 그중에 하나는 조선노동당 당원이 되는 것이었어. 당원증을 받으면 그래도 사람답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기 때문이었지. 당원이 되기 위해 죽어라 일을 하고, 윗선에 뇌물을 바치기도 하더구나. 아버지는 정치학교에서 왔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 조선노동당 당원이 되었단다. 함주에 온 뒤로 3년에 한 번씩 3개월 동안 정치학교 보수교육을 받기도 했어.
당원증은 여권처럼 생긴 작은 빨간 수첩이었어. 표지를 넘기면 김일성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지. 뒷장에는 내 사진과 당비 체납 여부를 기록하는 칸이 있었어. 당원증을 평소에 항상 메고 다녔어야 했는데, 당원증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거나 훼손되어 있으면 당원 자격을 박탈시켜 버렸단다. 그래서 당원증을 손수건으로 둘러싸서 직접 실로 꿰매고, 물이 들어가지 않는 케이스에 넣어 다녔지.
하지만 당원이 됐다고 해서 무조건 잘 사는 건 아니었어. 아무리 당원이라도 아버지는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늘 감시 대상인 51, 52계급에 불과했단다. 성분으로 인한 차별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서 북한에서 낳은 아들에게도 계속됐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