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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는 꿈

엘리베이터, 거리, 마카롱

by Nope

이건 아주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이야기야. 눈을 감고 의식을 놓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상. 다시 말하자면 ‘꿈’이야.

처음부터 이런 꿈을 꾼 건 아니었어. 익숙한 간판이 생경한 배치로 뒤섞인 거리를 헤매고 잘 아는 친구를 만나 마카롱을 먹으러 가기 바빴으니까. 청록색 파도를 쫓아 302번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갈 때도, 비가 갠 거리에 물기 어린 발자국을 남길 때도. 사방은 언제나 벽 없이 탁 트여 있었어. 문 같은 게 나타나더라도 힘주어 밀면 열리기 마련이었고.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눈꺼풀을 맞대고 숨을 고르게 쉴 때마다 그곳이 보이기 시작했어. 열림 버튼을 연타해도 대답하지 않는 쇠문. 거울은 눈길 닿는 데마다 존재했어. 그 아래엔 난간이 붙어 있었지. 숫자가 멈출 줄 모르고 커지더라. 나는 분명 우리 집이 있는 23층을 눌렀는데 32층을 지나 73층까지 올라가더라고. 더 숫자가 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 그래서 차마 텅 소리가 나도 내리진 못했어.

그런데 오늘, 드디어, 마음을 먹고 열린 문 사이로 걸어나갔어. 보니까 문 없는 통로 아래서 커튼 같은 게 펄럭이고 있더라. 그 사이로 흐린 하늘이 아주 잘 보였지. 왜 맑은 날이 아니었을까? 글쎄, 나도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 단지 그 통로 끝에 건물 옥상이 있었다는 것만 말해줄게. 우리가 처음 만난 데랑 너무 비슷했거든.

기억나? 우리가 맨 처음 만난 날. 그날 일은 너한테도 흑역사라고 했으니까 더 자세히 쓰진 않을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 학기가 끝나고 봄이 되어도 지금처럼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분명 넌 멀리 이사 간다고 했잖아. 아마 가을에 학기가 시작해 여름에 끝나는 곳이랬나. 그래도 다행이지. 편지는 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왜 이런 편지를 썼냐고? 글쎄.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도 친구는 너뿐이니까? 아. 다시 보니 좀 쑥스럽다. 답장은 우리 집 우편함에 넣어둬. 4단지 2301호. 너라면 당연히 기억할 테지만 혹시나 해서 한번 더 적었어. 잉크 마르는 대로 당장 이 편지 들고 너희 집 우편함까지 뛰어갈게. 목욕재계하고 기다리… 농담이야! 아무튼 읽어줘서 고마워!

추신: 네 답장이 눈에 선하다. ‘이번엔 개꿈 타령이야?’
그래도 기분은 안 나쁠 것 같아. 끝까지 읽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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