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량과 편리함 사이에서
햐얀 조명 아래 색색의 용기가 늘어선 진열장. 그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다인이 생각에 잠겼다. 인류의 영원한 고민, 오늘 뭐 마시지.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될 터였다.
-뭘 고민해? 빨리 아무거나 골라.
그게 그거잖아, 라고 누군가가 다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린 듯했다. 다인은 애써 그 속삭임을 무시했다. 그녀에게 500ml와 600ml는 하늘과 땅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분 좋게 들고 다닐 수 있고,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자세로 마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용량, 500ml. 단점이 있다면 너무 평범해서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라는 것뿐.
반면 600ml는 손에 다 안 찰 정도로 묵직했다.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서 마셨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옷이고 이불이고 다 버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온몸에 작용하는 효과만큼은 확실할 터였다. 자신도 모르게 600ml 쪽으로 뻗어가는 손을, 목소리가 막아섰다.
-너 팔도 다쳤잖아. 뭔 600ml야. 제대로 들 자신은 있어?
다인이 항변했다. 누가 캔째로 마신대, 집에 컵도 있잖아. 오늘만을 위해서 사놨다고. 목소리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컵으로 마시면 백 퍼센트 흘린다. 누워서 마신다면 더욱더.
하긴 다인은 캔에 든 무언가든, 페트병에 든 무언가든 다른 용기에 옮겨서 마신 적이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귀찮아서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 예컨대 의외의 행동을 가리킬 때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는 말, ‘귀찮아’. 마법 같은 세 글자.
그래서 다인은 목소리를 무시했다. 목소리도 잠잠해진 듯했다. 계산대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외칠 때까지는.
-지갑이랑 신분증, 챙겼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페이 앱이랑 모바일 신분증 하나로 다 해결돼!
-그럼 됐고. 이불에 흘려놓고 나중에 내 탓하지 마라?
뭐래. 목소리가 다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인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부드러운 이불 위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캔을 따고 내용물을 들이켤 순간을 상상하며. 생각만큼 평화로운 광경일지 아닐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목소리 말대로 세상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행복-
‘잔액이 부족합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다인을 현실로 데려왔다. 맞아, 난 아무것도 마실 수 없는 신세였지. 다인의 뒤로 편의점 문이 닫혔다. 경쾌한 방울 소리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