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내가 영어로 수업을 들었다고? 진짜로?

남아공 생존일기

by 제드 Jed

남아공 고등학교 수업은 내가 알고 있던

학교랑 완전히 달랐다.


한국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정해진 교실에서

하루 종일 가르치지만,
여기선 학생이 교실을 옮겨 다녔다.
마치 대학생처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내가 직접 고른 6과목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듣는다.


필수 과목은 영어랑 제2외국어.
나는 영어 외에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고,
선택과목으론 수학, 과학, 드라마, 회계를 골랐다.


드라마는 그나마 재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수업이 ‘토론’ 중심이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아무것도 적지도 않고,
교과서도 거의 안 쓴다.


“자,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을 읽었죠?
이 대사에서 ‘사랑’이란 뭘 의미할까요?”

그리고 학생들끼리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말하고, 또 말하고, 서로의 의견을 듣고, 반박하고…
나는 그 가운데 앉아,
그냥, 조용히 벽지가 됐다.


그날 영어시간,

얼마 전 선생님께서 내주신 시(Poem)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발표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매일 기숙사 숙제시간에 단어 뜻을 외우고,
발표할 멘트까지 만들고,

기숙사 친구들과 연습도 했다.


그런데 막상 발표 순서가 되어

친구들 앞에 서니까… 머리가 새하얘졌다.


목소리도, 단어도,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민우?"
선생님이 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푹 주저앉았다.


그 순간의 창피함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게 내 생애 첫 번째 발표의 기억이다.


학교는 랭귀지스쿨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엔 누구도 나를 위해

쉬운 단어를 쓰지 않았다.
선생님은 말을 천천히 하지도 않았고,
질문을 반복해 주지도 않았다.


“그냥, 네가 따라와야 해.”
그게 이곳의 룰이었다.


수업은 처음 6개월 동안 진짜 지옥이었다.
나는 수업 내용을 단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시험은 이해도 못한 채 빈칸으로 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마음속에선

‘내가 여기 왜 왔지?’
하는 후회가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기숙사 친구들과 럭비부였다.


주말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기숙사 사감이 나 하나 때문에
주말을 반납할 수는 없으니까.


그 사실을 안 친구들이
나를 하나 둘 자기 집에 데려가기 시작했다.


웨인의 집에서는
브라이(바비큐)를 먹었고,
앤드류의 집에선
앤드류 아버지랑 같이 럭비를 보며

간단한 영어를 배웠다.

“민우, hungry?”
“민우, come first?”
“민우, try this!”


그 짧은 문장들이,
나에겐 교과서보다 더 큰 영어 선생님이었다.


이상하게도,
주말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돌아오면
수업 시간이 덜 무서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드라마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민우, 오늘은 너 차례야. 넌 ‘리어 왕’이야.”


나는 주어진 대사를 또박또박 읽었다.
발음도, 억양도 틀렸지만,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내 생각을 덧붙였다.
“리어는… 음… bad father, but…

he love… daughter.”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박수가 나왔다.
선생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이 수업을 따라가고 있구나’
하는 감정을 느꼈다.

아직 영어는 완벽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해 못 한 단어가 쏟아졌고,
숙제엔 빨간 글씨가 가득했지만…

나는 외톨이가 아니었다.


기숙사에서도, 수업에서도
내 자리가 생기고 있었다.


그건 나에겐,
어떤 시험에서 A+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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