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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하고 있다

흔적

by 등대지기

흐르는 땀을 훔칠 시간조차 아깝게 바쁜 몸놀림으로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아저씨 옆에서 나도 하나 짚어 드렸다."에이 옷 더러워지니 저리 가시오, 빨리 저리 가시오, 얼른 이요" 하며 나를 반갑게 밀어내려 했지만 이마에서 떨어지는 식은땀을 소매로 닦으며 "고맙구려 정말 고맙습니다" 한 마디하고 홀연히 다음 장소로 가고 계셨다. "선생님 제가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아저씨를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었으니까. 어느새 산 넘실에서 날이 밝아졌는지 어두웠던 거리가 한눈에 세상의 아침을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이 바빠졌다. 늦었는지 높은 산비탈에서 급히 뛰어내려오는 아가씨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한 손으로는 입술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그림을 그렸다. 아침부터 엄마랑 무슨 이유로 한바탕 소동을 벌렸는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듯한 사춘기 여자아이가 흔히들 말하는 깻잎 머리에 하얀색 머리핀을 꽂고 씩씩대며 신발을 구겨 신고 학교로 향하는 스쿨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봐 서는 딱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바지 주머니 안에 어제 쓰고 남은 천 원짜리 한 장이 있다. 뭘 할까 하다가 어제 할아버지가 계신 슈퍼로 갔다. 역시나 나이가 드시면 새벽잠이 없다더니 할아버지네 슈퍼에는 벌써 문이 열려 있었다. 순간 나는 방긋이 웃고 있는 활짝 핀 해바라기를 연상 케하는 이 사람의 칫솔을 바꿔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홍 핑크빛 손잡이 색깔의 칫솔을 사고 집으로 들어왔다. 다시금 엄지 검지를 힘주어 치약을 짜고 새 칫솔을 내가 먼저 쓰고 헌 칫솔을 버린 그 자리에 두었다. 다시금 집 안을 둘러보고 대충 손이 가는 곳을 한 번 더 정리를 해 놓고 나왔다."죄송합니다 선반 위 2만 원 더 챙기며 3만 원 아니 두 배로 갚겠습니다"라는 메모를 두고 나왔다. 약간의 배가 고팠지만 참을 만도 했다. 잠시 나를 머무르게 했던 이 동네를 구경하다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행인들을 구경하고, 밤새워 잘 잤는지 기운차게 먹이를 쪼고 있는 이름 모를 새들을 본다. 심술 나게 신나게 아침을 먹고 있는 새들을 향해 발길질을 해 본다. 이 녀석들 기분 매우 나빴는지 없던 기운까지 모두 내며 휙~하고 날아가 버린다. 나도 참 못났다. 나를 비웃고 나한데 쫑알쫑알 해코지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못난 마음먹고 심술을 부렸나 보다. 휴대폰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분명 휴대폰 시계는 흘러가는데 안부를 묻는 연락조차 없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문을 열었다. 밤새 편의점을 지켰는지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내 또래 보다 어려 보인다고 할까, 군대 가기 전 돈을 벌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였다. 밤새워 편의점을 지킨 듯 머리카락에는 기름기가 뺀질 그리며 흘러내렸고 눈에 눈곱이 끼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컵라면을 계산해 주었다. 컵라면을 먹은 첫 손님은 아닌 듯 금방 먹고 간 흔적들의 국물과 찌꺼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편의점에 놓인 휴지를 제법 많이 뽑아 한 장으로 테이블을 닦아내고 나머지는 학생 모르게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언제 가는 쓸 수 있는 휴지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컵라면으로 분명 내 배 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함 과 황홀함 이 2배 3배로 즐겨야 하는데 금방 줄어들고 있는 건더기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껴 먹을 걸 순식간에 건더기와 국물은 사막에 잔잔한 바람에도 날아가 버리는 모래알처럼 금방 사라졌다. 혹시나 한 방울이라도 더 먹어 보려고 빈 용기를 괜히 거꾸로 들어 이마 위에 올리고 입술을 내밀어 본다. 주머니 안에 휴대폰에서 울리는 문자 메시지 "뭐야~청소도 해 주고" 어디선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지 급하게 편의점에서 나와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사방을 둘러봤지만 나를 의심하듯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 누군가 찾고 싶었다. 헐레벌떡 신고 있던 슬리퍼가 벗겨질 정도로 집으로 뛰어갔다. 아무도 없다. 아침에 내가 해 놓은 그대로의 모습이다. 설마 하며 선반 위 내가 쓴 메모가 없어지고 몇 만 원이 더 올려져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분명 한 건 지금 그 사람이 왔다 갔다.

그리고 또다시 알림 문자 메시지가 왔다."며칠 못 와, 잠시 시간이 주어지면 이렇게 집에 올 거야 너를 보고 나서 내 삶이 더 행복해지는 거 같아 미안하고 고마워"

급하게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긴 신호만 갈 뿐 받지를 않았다. "누구신지? 저를 만날 수 있는지요?" 하며 문자 메시지도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정말 찾고 싶었다.

내가 없는 것을 보고 집으로 온 건지 집을 비우지 않았더라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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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