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변하고 있다

기다림

by 등대지기

마음이 참 허전하다. 누군지 알았으면 나를 조금 더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미안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텐데 약간의 아쉬움으로 다시 집을 나선다. 며칠 동안 집으로 오지 못한다는 문자 메시지가 혹시 나를 더 있게 하려는지,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루 이틀 더 있을 것을 마음속으로 돼 새기며 집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가니 작은 시내가 나왔다. 내 몸마저 거부하고 싶은 낡고 닳은 사각팬티를 먼저 벗고 싶었다. 속 옷 가게로 가서 팬티 두 장을 사려고 하다가 하루 이틀이면 바람이 되어 떠나갈 것이기에 한 장이면 충분할 거 같아 한 장만 샀다. 드디어 이 허물을 벗게 되는 것인가, 다시 집으로 향하는 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마트에 들러 쌀 한 봉지와 주방 도구 몇 개와 밥그릇 국그릇 2개씩도 샀다.

"이건 신혼집 분위기" 혼잣말로 되새기며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손이 자연스레 간 게 분명하다.

어떡하지 점점 이 집이 싫지는 않았다. 할 일도 찾지 못하고 갈 곳도 없는 내게 보금자리를 준 것에 그냥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찾기 전에는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오기가 갑자기 생긴 듯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며 다짐했다. 선반 위 만 원짜리 몇 장을 더 챙기고 편의점에서 챙겨 줬던 휴지를 가지런히 정리해서 테이블 위에 놓고 그릇들을 씻어 놓았다. 누군지 모를 이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게으른 마음속에 불현듯 사랑이 찾아왔는지 이 사람을 지켜 주고 싶었다. 주위를 한 번 더 정리를 해 놓고 다시 만난 우리의 만남이 아마도 우연히 자연스레 만나겠지 하며 집을 나섰다. 사람 사는 집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갑자기 문득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제 새벽에 보았던 청소 아저씨를 만나 옆에서 일을 도우며 용돈이라도 벌고 싶었다. 아니 용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부지런히 만들고 싶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이 사람들 틈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볼품없는 사람이 아닌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 선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시 대형마트를 향했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이 사람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 주고 싶었다. 제일 작은 김치를 사고 제일 작은 참치 통조림을 사고, 마치 오래된 단골손님처럼 대형마트 또한 불편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왜 이렇게 가벼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신이 났다. 찜통 같은 이 무더위도 꿈틀꿈틀 꽁꽁 언 땅을 비집고 피어나는 아기 새싹처럼 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겨 낼 수 있었다. 작은 가스버너 위에 밥을 짓고, 김치를 볶아 밥 상을 차렸다. 나는 먹지도 않았는데 이 작은 공간 속에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함으로 금방 배가 불러왔다. 나는 밥 상을 차려 놓고 메모를 남겼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너를 욕심내서 찾지 않을게"

그리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볼품없는 슬리퍼를 집어던지고 메이커가 아닌 시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하얀색 운동화를 하나 사고 아이보리색 면바지와 하얀색 티셔츠를 샀다. 나를 먼저 바꾸기 위해 노력을 했다. 전봇대에 붙여진 아르바이트 공고문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전화를 계속했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면접도 보기 전에 "죄송합니다. 안 되겠네요. 아르바이트 구했는데요" 하며 성실히 살아보고자 했던 나를 모두 거부하고 있었다 화가 났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을 먹고 나를 버리고 너를 위해 살자는 더욱 단단한 마음을 먹기로 했다. 전화번호가 보이는 대로 쉴 새 없이 전화를 했지만 정말인지 쉽게 나를 반겨주지는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언젠가는 나도 넥타이를 매고 구두 신은 정장 차림이 신사가 아니더라도 바쁘게 움직일 시간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오늘은 잠시나마 나를 세상에 집어던져 본 하루였고 가을을 향하는 바람이 조금은 시원했다. 하지만 한여름의 뙤약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이 여름 또한 곧 가을에게 자리를 비껴 줄 날이 올 것이다.

차려 놓은 상은 그대로 있다. 어쩔 수 없이 이 밥상은 꾸역꾸역 내가 먹게 되고 다시금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워도 치워도 정리할 게 많았다. 방구석에서 구겨진 한 사내의 증명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이별을 오래전에 했는지 구겨진 증명사진은 사내의 얼굴조차 구겨져 펴지지 않았다. 나름 인물이 괜찮아 보이는데 왜 이별을 했는지 잠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 아닌 이 사내도 여기 이 집에서 이 사람과 사랑을 나눴겠지라는 약간의 초라한 생각을 해 본다. 지하 방이라 햇볕은 들지 않지만 그나마 무더위 틈 속에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방구석 틈 사이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개미를 보았다. 이 녀석이 하며 매운 손맛을 보여주며 잡고 싶었지만 종종걸음으로 어디로 바쁘게 가는지 가만 지켜보았다.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까만 등 위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먹이가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이 개미 만이 알 수 있는 공간 속에 어린 개미들이 어미 개미를 애타게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개미를 잡지 못했다."그래 이쁜 아가들이 기다리겠지" 하며 냄비 안에 있는 밥풀 몇 개를 개미 앞 길목에 놓아두었다. 말동무가 생긴 기분이었다.

장이라기보다 그냥 걸려 있는 옷 들을 세탁을 했다. 언제 입었는지 모를 그 사람의 너 들어들 한 속 옷도 있었다. 손가락 두 개로 집어 들었다. 세탁하기에는 왠지 많이 부끄러웠다. 산 짐승처럼 혈기왕성한 충동으로 킁킁 냄새도 맡아봤지만 괜한 변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금씩 변해가는 집 안이 볼 만은 했다. 정리가 된 듯하면서도 정리되지 않는 듯한 바탕 세탁을 하고 하늘을 쳐다본다. 짝을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이 참 행복해 보이는 게 금방이라도 한바탕 소나기가 내릴 거 같다. 갑자기 찾아오는 검은 먹구름이 지나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바쁘게 했다. 역시나 날씨는 거짓말을 못하는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없어 손바닥으로 비를 막으며 뛰어가는 사람들이 급하게 나무 밑에서 옹기종기 제비처럼 비를 피하고 있다. 비가 금방 그칠 거 같지 않은 채 사람들은 하나 둘 편의점으로 들어가 가장 저렴한 우산들을 사 온다. 내 우산이라도 있었으면 빌려줬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트를 가면 이쁜 노란 우산을 사서 집에 놓아두고 싶었다. 이 사람도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 밑에 서 있겠지. 소지품처럼 내가 산 노란 우산을 가지고 다니게 하고 싶었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