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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하고 있다

회상

by 등대지기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사막 한가운데 회오리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듯 길거리 정신없이 움직이는 행인들의 구경도 끝이 나고, 다시 혼자가 된 기분으로 방바닥에 등을 찰싹 붙여 누웠다. 등을 붙여 누워도 보고 배를 깔고 누워도 봤지만 혼자 있는 긴 밤은 여전히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잘 도착했는지 개미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내가 꼭 먹기를 바라며 그들이 다니는 길모퉁이에 두었던 밥 풀 2개도 보이지 않는 게 개미들은 한바탕 잔치라도 벌인 듯 배불리 잘 먹고 따뜻한 가족들 품에서 서로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외로운 적막감이 눈물과 함께 찾아온다. 말만 통하면 되는데 아니 내 이야기만 들어줘도 되는데 지금 심정이라면 누구라도 붙잡고 사정사정하며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문득 그 사람에게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하지만 욕심내서 찾고 싶지 않았고 그냥 기다리고 있으려 했는데 오늘 밤은 창밖으로 유난히 보름달 빛이 새색시 연지 곤지 찍은 볼 마냥 눈이 부시도록 이뻤다. 생각이 났다 자꾸만 생각이 났다 눈을 뜨고 있어도 생각이 났고 눈을 살며시 감았는데도 생각이 났다. 잠시 후 문자에 울렸다 "나는 이제 행복해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를 기다리며 찾았다니 소름이 돋았다. 혼자 조용히 누워 있는 이 조그마한 방이 한 겨울 눈 속에 갇힌 이글루처럼 너무 추웠다. 때로는 아궁이 한가득 장작을 핀 온돌방처럼 마음은 뜨거웠는지 모른다. 지난 시간의 순간순간들을 퍼즐 조각 맞추듯이 기억을 더듬어 본다. 고등학교 입시 경쟁을 준비해야 하는 중학교 3학년 선도부를 하면서 한 학년 아래 가수 이덕진을 너무나 좋아했던 후배와 늦은 밤 몰래 통화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추억, 고등학교 2학년 학창 시절 생물 교생 선생님과의 아무도 몰래 주고받았던 순수한 첫사랑의 편지들, 버스 안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눴던 한 살 연상의 고3 누나, 고등학교 3학년 읍내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겨울 외투 주머니에 몰래 편지를 넣어주고 도망갔던 동갑내기 친구, 그리고 20살 대학시절 갑자기 찾아온 뜨거운 사랑에 미쳐 결국 코스모스 가을학기에 대학 졸업장을 혼자 받게 되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사랑에 미치는 게 아니라 남들처럼 공부에 학업에 미쳤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 들고 멋있는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을 텐데 모두 부질없는 청춘 사랑에 빠져서 진흙탕 인생이 되고 말았다. 시골 산까치 소리 들으며 언덕에 올라 소 풀을 먹이며 자랐던 내 고향은 남해다. 순수했던 학창 시절 자식 대학 보내면 끝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귀하게 키운 소 팔아 대학 등록금 내시고, 아버지 어머니 두 다리 펴고 주무신다고 하셨는데 빌어먹을 글 좀 써 보겠다고 대학 학과실에 자퇴서를 내밀었지만 부모님 찾아오셔 자퇴는 안 된다며 사정사정하셨는데 겨우내 코스모스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짝이 소용도 없이 종이 한 장의 졸업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괜한 소만 팔아 소 장수에게 끌려가는 눈물 흘리는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한평생 농사꾼이셨던 아버지의 유일한 말동무였는데 억지로 끌려가는 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가기 싫었을까! 어둑해진 창밖을 보면서 문득 중학교 3학년 시절 선도부를 하면서 교문 앞 불량 학생들을 선도할 무렵 일부러 이름표를 달고 오지 않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이 여학생은 당돌하게 선배님 저 선배님께 관심이 많아서 그런데요 제 관심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름표 안 달고 다닐 것이고 제 고백을 받아 주신다면 착한 후배가 될 것이라고 자기의 고백을 받아 주기를 원했다. 나는 후배의 고백을 편지로 받아줬고, 어느 날 음악실 책상 위에 큰 하트 안에 또 다른 DH 하트 HJ이라고 뾰족한 송곳으로 파진 흔적이 있었고, 미술실 칠판에는 DH 사랑 HJ이라고 많이 적혀 있는 것을 친구로부터 알게 되었다. 나는 읍내 문구점을 돌아다니며 겨우 하나 남은 이덕진 브로마이드와 이덕진 책받침을 아침 선도부 시간에 전해 주었다. 착한 학생으로 중학교 졸업하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우리는 학교 소풍날이 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순수한 사랑을 알아 갔는지 모른다. 그렇게 1년을 서로 알아가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소홀해지며 멀어졌다. 그리고 후배는 부모님의 간섭이 싫어 주경야독이라는 먼 고등학교를 선택하며 고향을 일찍이 등지고 떠났다고 들었다. 간혹 이 후배가 궁금했다. 도시로 떠난 후 새로운 고등학교에서 또 다른 남자 친구가 생겨 그 친구와 새로운 만남으로 사랑에 눈을 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친구는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고향에 내려가면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어느 날 동창 모임 친구에게서 듣게 된 소식은 애 둘 낳고, 남편과 긴 법정싸움을 끝으로 이혼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며 살고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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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