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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하고 있다

그 누나

by 등대지기

코수염이 시커멓게 자라고 첫 면도를 하던 고등학교 2학년 이른 여름 때의 추억이 문득 떠오르다. 1주일 내내 까만색 교복을 입고 야간자율학습까지 지친 우리들에게 행복한 보상은 토요일 주말이다.

토요일은 늘 11시 50분 4교시 수업을 한 후 하교를 하였다. 이때의 학교 교칙은 토요일에는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다녔고, 나는 사촌 형들이 줄줄이 입고 물려받은 면바지나 나팔 모양의 청바지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우리 어머니는 왜 그렇게 옷을 안 사 주셨을까! 한 철 지나면 작아져서 못 입는 막내형 의 옷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바지들을 앞뒤로 살피더니 "안 뜯어졌지' 네가 잘 입고 동생에게 물어줄 수 있겠지" 하며 나를 잘 타일러 주었다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주면 주는 대로 입을 못이 없으면 그냥 모범생 코스피처럼 교복을 입고 다녔던 거 같다. 집 안의 막내인 친구들은 객지에서 직장 생활하는 형, 누나들의 찬스로 일명 메이크 청바지를 입고 사복 입는 날이면 마치 소개팅이라고 할 듯한 기세로 아주 멋지게 다녔다.

사실 나는 부모님께 용돈도 안 받고 다녔고 형, 누가가 없었기에 용돈이 풍부하지 않아 많이 부러웠다. 알록달록 색깔의 와이셔츠 위 단추를 풀고 다닌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모범생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그냥 단정하게 다녔다. 화창한 주말 어느 날 그날도 집으로 가는 빨간 완행버스를 탔다. 많은 또래들이 탔던 버스에는 사춘기 청소년의 땀 냄새와 이성에 대한 성숙한 향기가 코를 찌를 정도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안녕! 잘 가! 혹은 너무 친했기에 거침없이 욕설을 하며 짓궂은 친구들도 참 많았다. 만 원 버스가 아닌 조금은 여유로운 버스 안 나는 창밖을 보며 자연이 주는 따스한 햇살을 선물 받은 기분으로 혼자 눈을 감고 웃고 있을 무렵 연한 빨간색으로 머리 물을 들인 누군가 옆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몇 학년이니?" 떨리는 마음이 오히려 겁이 났다. 흔히들 말하는 껌 좀 씹는 학교의 여학생이었고 깊은 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2학년인데요라고 했더니 제 어깨에 팔을 얹더니 "나는 3학년인데 늘 네가 귀엽더라고 학교 졸업하기 전에 너한테 꼭 말하고 싶었어~겁 내지 마.."나는 멀뚱멀뚱 누런 황소가 슬픔을 대신 표현하는 눈물 맺힌 눈망울로 주인을 바라보듯이 순간 눈물이 났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내려야 하는데 내려야 그 누나의 팔이 내 어깨에 매달려 "내려야 하는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너무 무서워 내려야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철봉에 매달린 어린아이처럼 40분을 지나고 나서야 누나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얼떨결에 따라 끌려 내렸고, 누나는 낯선 곳에서 발을 동동치는 나를 보고는 "겁내지 마 아까 내리는 곳에 내린다고 하지 왜 말을 못 했니!" 나를 위로해 주면서 다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같이 타고 갔었다. 누나는 내 손을 들썩 잡더니 너를 1년 동안 봐 왔고 후배들 한데 네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 너는 나를 못 봤겠지 늘 네가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숨어 널 봤으니까~솔직히 내 일기장 속에 전부 네 이야기야 하며 피식하며 웃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고 얼마나 오래 이 만남이 지속될지 모르지만 누나의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엽게 보여 좋아졌다. 그렇게 우리는 주말 집으로 가는 완행버스 시간을 맞추며 서로 기다렸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별을 하게 된 이유라면 어느 날 읍내 버스 터미널에서 어느 대학생 형처럼 보였다고 해야 하나 심한 폭언을 하며 싸우는 장면을 봤다. 분명 어느 누군가가 잘 못을 했기에 큰 싸움이 일어났겠지만 나에게 줬던 다정함보다는 그야말로 푸른 초원에서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맹수 같아 보였다. 나에게 줬던 다정함이 본모습인지 아니면 맹수 같은 모습이 본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누나를 자연스레 피하게 됐고 우리가 기다렸던 버스도 나는 타질 않았다 휴대폰 삐삐조차 없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랑이 아닌 작은 바람에도 심하게 흩날리며 꺼질 듯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살아나는 촛불 같은 따스함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얀 피부에 늘 선생님 단속을 피하며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교복 치마 끝 단이 무릎 위에 있었던 그 누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나라는 존재를 잊은 지 오래됐겠지~아니 생각조차 안 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나 때문에 설레던 그 마음은 잠시뿐 한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심한 폭언으로 나를 실망시킨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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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