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춘기의 스트레스와 둘째라는 이유 그리고 극도로 심한 불안감과 우울증까지 모든 게 복합적으로 쌓여 있는 사랑스러운 우리 둘째다. 하루는 라디오를 듣다 한의원 원장님이 나오셨는데 둘째의 손 떨림에 대해서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사춘기 딸에게 잘못된 비유가 될 수 있지만 마치 술을 안 마시면 알코올중독자인 듯 담배를 끊으면 금단연상처럼 손 떨림이 너무 심하다고 했더니 나에게 돌아오는 첫 질문이 몇 살이냐? 몇 째냐? 를 물었다. 즉 사춘기의 스트레스와 불안한 마음의 증상이라는 답변을 받으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다른 잡생각이 들지 않게 여행 을 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9년 전 집사람 친구네 부부랑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최강여름을 자랑하는 8월 중순에 떠난 제주도 여행은 그야말로 정말 더위와 싸워 땀으로 얼룩진 기억 밖에 없다 더군다나 막내가 2살이다 보니 포대기에 메고 다니면서 덥다고 징징대고 그래도 즐거운 제주도 여행이 생각나서 주말 새벽 제주도 비행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내의 허락도 없이 지름신이 갑자기 찾아와 무작정 4장을 끊어 버렸다. 한 동안 잘한다 잘한다 귀여움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오랜만에 허락도 없이 끊어버린 비행기표에 지독한 바가지를 끍혀야 했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형편에 돈 들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곧 애들 중간고사에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생각도 없이 일을 저 지르냐고 몰라 알아서 해. 속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하고 휑 방문을 닫아 버린다.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애들을 위해서 한 번만 눈 감아주고 "잘했네 잘했어" 마음에 없는 칭찬이라도 해 줬으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어렵게 구한 비행기표를 취소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다녀오자 애들 비행기도 안 타 봤고 친구들은 해외여행 다녀왔다고 자랑한다는데 우리는 제주도라고 다녀오자 내가 준비 다 하고 계획 짤 테니까 몸만 따라오면 되지 않을까" 겨우 토라진 아내를 달랬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을 위한 비행기 좌석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 사이 모든 게 번개처럼 준비가 끝이 났고 4월 5일 아침 7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전날 분주하게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잠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그 설렘에 잠을 안 온다고 했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 간다는 이야기를 미리 안 하고 금요일 저녁 짐을 챙기면서 이벤트로 이야기를 했다. 둘째랑 막내는 그동안 짧은 인생에 최고로 기분이 좋다며 꿈꾸는 거 같다며 친구들 선물을 사 와야지 하는 많은 생각들로 행복함 그 기분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고 한다. 주말 아침이 밝았고 5시에 일어나 챙겨놓은 짐을 챙기고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6시도 채 되지 않았다. 공항에 많은 사람들로 진짜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라며 좋아서 제일 먼저 티켓팅도 하기 전에 눈에 아주 잘 띄는 아이들의 대통령 간식 젤리마트가 눈에 들어와 비행기 안에서 먹을 간식으로 조금씩 샀다. 이 녀석들 용돈을 모아놨다며 본인의 카드 결제를 하는데 너무 대견스러워 본인들 카드에 만원씩 더 입금을 해 줬다. 무작정 갑작스레 떠나는 여행이라 어디로 갈지 계획은 짜지 않았지만 비행기 시간에 맞춰 탑승을 했다 비행기 창 밖으로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결국 구름 사이로 비행기는 숨바꼭질을 잠시 하더니 제주도 공항에 도착했다. 제주도 돌하르방이 반갑게 맞아주며 아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쁜 생각들과 나 또한 직장 업무에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기분으로 봄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바람은 유난히 더 시원했다. 아내 또한 비행기 안에서 애들을 챙기느라 분주했지만 제주도 땅을 밟고는 행복은 전염병이라고 했던가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렌터카를 빌려 결재를 하고 아침을 포기한 채 집에서 서둘러 나왔기에 배가 너무 고파 유명한 고등어쌈밥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통통한 고등어 살에 붉은 양념들이 이불 삼아 덮인 채 무는 베개 삼아 넓은 조리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데 군침으로 인한 침샘들이 입 안에서 한바탕 잔치로 소란스럽다. 아내는 제주도 봄나물에 취해 밥 대신 나물로 배를 채우고 아이들은 고등어찜을 살짝 감싸 안은 잘 익은 김치를 밥 위에 얹어 먹는데 참 복스럽게도 먹는다. 행복하게 배를 채우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별커피숍에 가기로 했다. 동화마을이라는 곳에 별커피가 있었고 어디서 이렇게 소문을 듣고 오는지 커피 주문만 30분을 기다려 커피 향을 맡으며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맛은 어딜 가나 똑같은 맛은데 경치가 다른 곳 보다 더 맛이 있는 거 같다. 결국 둘째가 이곳에서 작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화장실에 휴대폰을 놓고 왔단다. 그나마 별커피숍에 있을 때 알아서 화장실에 가 봤지만 누가 들고 갔는지 휴대폰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고 30번가량의 전화 끝에 누가 주워서 맡겨 놨다고 했다. 속상할까 봐 끓어오르는 화를 내지 못하고 가방에 넣어 다니면 잃어버리지 않을까 딱 한 마디로 끝이 났다. 동화마을에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핸드크림을 샀고 둘째는 집에 있는 언니에게 선물한다며 제주도 폼클링징과 키링 인형 몇 개를 샀다. 언니가 그렇게 심부름시켜 먹고 약 올리고 신경질 부리고 하는데 언니 생각이 나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내 언니고 의지할 언니가 있어 얼마나 좋은데 꼭 챙겨야지" 하는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무계획으로 떠난 제주 여행이었기에 한 곳의 여행이 끝나면 나는 휴대폰 검색으로 정신이 없었다. 무계획 하루가 지치도록 길었다. 무작정 숙소를 찾아야 했기에 또다시 폭풍 검색으로 저렴한 3층집 중 2층을 잡았고 숙소로 가는 길에 해수욕장이 보여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가 큰 바다에 자유를 찾은 듯 아이들과 나는 해수욕장으로 뛰어들었다. 지친 피로가 풀리는 듯했지만 금방이라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아내는 휴대폰 배터리가 사라질 때까지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있었지만 햇볕에 익어버린 얼굴이 한 여름 하늘에 제일 가깝게 떠 있는 붉은 홍시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듯 얼굴에 짜증이 섞여 있어 잠시동안 해수욕장의 즐거움이 끝나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와 좋다. 별로다 하는 생각 없이 들어가 에어컨을 먼저 켰을 때 오래된 자동차 엔지소리처럼 소음이 많이 심했다. 긴장과 짐을 풀고 쉬고 있을 때 사춘기 둘째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은 조금이나마 풀린 거 같아?"
"사실 몸은 힘든데 그냥 이렇게 여기까지 그 아이들과 멀어진 거 만으로도 너무 좋아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거 같아 아빠 고마워, 침대에 엎드려 있는 엄마를 툭툭 치더니 엄마도 미안하고 정말 고마워"
우리는 1시간가량 휴식을 즐기고 근처 마트에서 삼겹살과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라면을 구매하고는 어둑어둑 해 질 무렵 즐겁게 삼겹파티를 했다. 목구멍으로 타고 들어가는 맥주 한 모금이 하루 피로를 깔끔하게 씻겨주는 듯 컵라면과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휘휘 감아 먹는 아이들을 볼 때 저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아빠의 존재가 나라서 참 행복하고 눈물이 났다. 짧은 오늘의 여행이 가족들에게 평생도록 오래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둘째에게도 막내에게도 마음의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면 참 좋겠다. 딸아~언제나 아빠는 네 편이야. 너의 곁에서 꼭 안아 줄 수 있는 큰 나무가 되어줄게 우리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