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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의 눈물

by 등대지기

오후 6시 30분에서 7시 사이 퇴근길이면 어김없이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린다. 겨울철이면 해가 일찍 고개를 숙이다 보니 어둑어둑 짙은 어둠이 빨리 찾아와 벌써 저녁을 드시고, 보일러도 안 켜고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누워 계시겠지만 지금 철이면 아직 해가

뉘엿뉘엿 길다 보니 전화를 드리면 아직 밭에서 잡초를 뽑거나, 고추를 딴다며 바쁘다고 전화를 끊어라 하신다.

15년 전 우리 큰 딸이 3살 구정 설을 보내고 나와 아내는 차가 막힐 것을 염려하여 3살 1살 두 딸을 데리고 부산으로 올라왔다. 아버지 엄마 친구분들은 일찍 손자 손녀를 봐서 늘 장가 언제 갈 거냐 며느리 언제 볼 거냐 하며 잔소리를 하셨다. 그런 부모님 곁에 명절 며칠을 이쁜 손녀들이 재롱 피웠으니 식사를 안 하셔도 배가 부르다며 하셨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담배를 태우시는 아버지께 제발 담배 좀 끊어라고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하셨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던 아버지가 큰 손녀가 생기면서 몇 년 동안 실패하던 엄마 앞에서 있던 담배랑 라이터를 과감하게 버리면서 담배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렇게 매일 기분이 좋으신 아버지는 우리가 부산으로 올라오고 아침 해가 밝자 경운기를 타고 논으로 나가셨다. 겨울 찬 바람이 아직 채 꺾이지도 않았던 날인데 무슨 일로 경운기를 타고 나가셨는지.. 엄마는 늘 농사철이면 자식들에게 민폐 안 끼치기 위해 늦은 겨울부터 서서히 봄 농사를 준비하신다고 하셨지만 그날은 내의를 두 벌을 껴 입어도 유난히 추웠던 날이었다.

처가댁에서 가족 모두 다 모여 아침을 먹고 있을 무렵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나?"라는 걱정스러운 전화가 아니라, 얼마나 울었으면, 얼마나 지쳤으면, 그리고 얼마나 놀랬으면, 빨리 진주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너희 아버지가 경운기 타고 나가서 사고가 났다. 정신도 못 차리고 응급실에 있는 빨리 와야겠다" 옆에서 놀란 이웃주민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해진아 해진아 너희 아버지 죽는다 어서 오너라 니 얼굴 보고 살란갑다 어서 오니라"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가 아직 잠에서 들 깬 잠꼬대 이길 그리고 꿈 속이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하지만 꿈이 아닌 전화기 속에서 울음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았고, 부랴 부랴 옷을 입고 1살 막내는 장모님께 맡기도 따라나서겠다는 아내랑 3살 큰딸과 함께 진주병원으로 향했다. 떨리는 마음이 운전이 불안했고, 친형과 같은 사촌 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아버지가 사고 났답니다. 진주 병원으로 가고 있는데 무섭습니다. 떨립니다" 형은 진주로 바로 가지 말고 잠시 가는 길에 멈춰 있으라고 했다. 큰형과 작은형은 택시를 타고 내가 있는 곳에 왔고, 작은형이 운전을 하며 어떻게 진주 병원까지 왔는지 여러 개의 주삿바늘에 의지하며 겨우 숨을 쉬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고 하느님을 찾았다. "하느님 제발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 제가 천벌을 받을 수 있다면 천벌을 받겠고, 평생 아파 침실에 누워 있어야 한다면 제가 누워 있겠습니다 제발 이제 자식 걱정 안 하고 겨우 두 다리 펴고 주무시는데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하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아버지 손을 꼼지락꼼지락 하면서

심장박동이 내려가는 침상 위 기계를 보면서 "아버지 아버지"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응급실 의사분들이 돌아가며 심폐소생을 했지만 큰 아들인 나에게 단단히 마음먹으라는 말과 함께 16시 40분 사망선고를 하셨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굴 작업을 하시던 엄마는 빨간 장화를 신은 채 급하게 병원으로 왔던 그날.. 지금 고2가 되어 있는 큰딸은 "그날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 할머니 빨간 장화 신고 계시고 병실에 쓰러지셨는데 작은 엄마 차 타고 할머니 집에 갔잖아" 하며 어린 3살의 그때의 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덧 엄마는 15년 하늘을 바라보며 "잘 있소, 사돈도 잘 만나고 자식들 아무 탈 없게 하늘에서 잘 지켜 보소" 하시며 텅 빈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 논에 밭에 혹시라도 동네 아주머니가 계시면 같이 내려오신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늘 외로운 엄마 걱정에 예전에는 한 달에 두 번씩은 시골집에 내려가 같이 식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농사일을 도우며 외로운 시간보다 행복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을 했지만, 지금 내 아이들이 커다가 보니 불효자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시골집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핑계 아닌 핑계가 아이들이 되었다. 고2첫째 중3둘째 그리고 초4 막둥이딸까지 주말에도 학원을 가야 하고 아내는 아이들 엄마들을 많아 대학입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결혼 전에는 우선순위가 엄마였다면 결혼 후에는 아내가 우선순위였지만 지금은 똥강아지 같은 아이들이 우선순위가 되어 아이들의 스케줄에 나도 운전기사가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엄마랑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이 퇴근시간뿐 인지 모른다. 전화기 넘어 엄마 목소리라 들린다 "아들아 날도 더운데 오늘 고생했다. 나는 고추도 많이 땄고 들깨는 벌써 너희 외삼촌이 와서 차로 실어 날라 수확이 끝났다. 창고에 호박이니 고구마 줄기 말린 거랑 토란대 말린 거랑 많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서 갖다 무라. 저 아주머니 내려가란가 보다 나도 따라가야지 아들 끊어라" 그렇게 숨 쉴 시간도 없이 엄마는 바쁘게 논에서 밭에서 하루를 끝낸다. 혼자 집에 오면 반기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 내가 어릴 적 추억이 아주 많이 쌓인 텅 빈 외갓집에 외삼촌이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외삼촌이 귀농을 하셨다. 엄마는 바쁜 날이 아니면 외삼촌을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 하시고 그나마 외삼촌 때문에 외로운 시간이 참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작년에 외숙모도 외삼촌 곁에 오셔서 봄이 되면 꽃놀이, 여름이 되면 냇가로, 가을이 되면 여러 축제, 겨울이 되면 온천으로 엄마를 꼭 모시고 다니신다. 내가 못하는 엄마에 대한 효도를 외삼촌 외숙모가 곁에서 도와주니 너무 감사하고 고마움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6남매 중 제일 큰 딸로 태어난 우리 엄마, 큰집 막내며느리로 들어온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 엄마 32살 내가 8살 때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줄줄이 밑에 동생들 챙기느라 젊은 나이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께 꾸중을 많이 들으셨던 우리 엄마. 그런 엄마가 이제 겨우 칠순을 넘기셨는데 한평생 농사일로 허리 한 편 펴지 못 한 채, 아버지 계실 때 몫까지 농사일을 다 하시려는 욕심 때문에 일이 끝이 없다는 우리 엄마. 나는 오늘도 퇴근길 엄마께 전화를 걸어 사소한 이야기부터 어리광을 부려본다. 그리고 올 구정 명절날 큰 며느리인 집사람을 앉혀 놓고 그동안 구정 추석 너희 시아버지 제사까지 챙긴다고 너무너무 고생했다며 설이랑 추석 차례상을 이제 차리지 말고 가족들끼리 앉아 밥 먹는 걸로 끝내자고 하셨습니다. 유난히 엄마가 그리운 시간입니다. 엄마 9월 13일 아버지 산소 벌초 하러 갈게. 그때 봐.. 나는 엄마 아들이라 정말 자랑스럽고, 엄마가 내 엄마라서 더더 자랑스러워 정말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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