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지옥을 버티기로 했다-5
법적인 문제말고도 꼭 풀어야 할 사안이 있었다. 은행에 상환하지 못한 8000만원 가량의 대출금이다.
상환일이 다가오자 한국주택금융공사, 은행은 나에게 상환 또는 기한연장 또는 대환을 해야한다는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신청하기 위해선 은행원과 상담을 받아야했다. 그렇지만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고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임대인은 여전히 미안하다고만 했고, 나에게 집을 매매할 생각은 없는지, 전세보증보험은 들어놓은게 없는지도 물었다. 그 사람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임대인은 전세보증보험을 왜 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땐 나도 언성이 높아졌지만 다행히도 욕은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를 못느꼈으니까. 이런 식의 대화가 반복되면서 2023년 12월, 2024년 1월, 2월엔 멘탈이 터져나갔다. 스트레스로 혼잣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소송을 시작하고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면서 나의 에너지는 모두 소진됐다.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 제일 중요한 대출금 문제는 '나몰라라' 한 것이다. 지나고 나니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전세금을 빌린 것은 나였고 갚지 못한 것도 나였다. 따라서 전세사기가 터진 것도 내가 스스로 은행에 알려야만 했다. 불편한 절차를 감당해야했다. 안타깝지만 은행에는 임차인의 이러한 사정을 바로 알 수 있는 장치가 없다.
또 은행이 임차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무런 절차없이 봐줄리가 없었다. 사실 전세 만료 전 은행 고객센터에 이 내용으로 상담을 한적이 있었다. 임대인의 낌새가 있었기 때문에 은행원에게 '집주인이 연락을 잘 안받는다', '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할 것 같다'는고 했다.
그래서 돈을 돌려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꼭 돌려받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전세기간이 끝나지 않았고 만에 하나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꼭 상환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아마도 은행원에겐 최선의 답변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보증금 상환일이 지나자 대출금은 곧 연체금이 됐다.
은행은 문자를 통해 대출금을 정리하지 못하면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고 안내했다. 나를 담당했던 대출계 직원은 계속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힘들더라도 은행의 전화는 꼭 받길 바란다. 받아서 현재 상황을 알리고 대책이 있는지 직접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당시 은행에선 기한연장, 대환대출, 채무조정 등 전세사기 피해대책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직업 상 은행업 가까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당사자가 되니 알아볼 생각을 못했다.
전세사기 대응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불편한 절차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냉정하게 봐야했다. 자기연민을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연체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내 신용점수는 곤두박질쳤고 신용카드도 쓸 수 없게 됐다. 말로만 듣던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현금, 체크카드 뿐이었다.
진짜 지옥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