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시 만나는 날
맵싸한 바람이다.
교실 문을 열 때마다 바람 냄새가 따라온다.
"에구, 추워라! 겨울은 겨울인가벼."
"이제 추울 때가 됐지. 그래도 옛날보단 덜 추워."
"군불 때던 시절을 생각해 봐."
"말해 뭐 해."
어르신들은 오늘의 날씨 이야기가 끝나면 그제야 내게 물으신다.
"선생님. 진짜로 내가 이름 도장을 파요?"
내가 '네'하며 크게 대답한다.
"공책 글씨도 엉망인데 어떻게 쓰나."
"필요하면 도장집에 가면 되잖아요."
"나는 이 나이까지 한 번도 도장을 써 본 적이 없어요."
"쓸 일이 없잖어."
시작하기도 전에 작벼리 같은 걱정이 앞선다.
어떤 어르신은 '난 안 해도 되는데...' 하며 말끝을 흐리신다.
어르신들은 무엇이든 처음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신다.
익숙한 것만 하고 싶어 하셔서 가끔 특별 활동 시간을 꺼리시기도 한다.
잠시 뒤,
어르신들의 떨떠름한 반응 사이로
상큼한 기운을 몰고 두 분의 강사가 들어온다.
교실 분위기가 환기되자 어르신들은 조금씩 관심을 갖고 궁금증을 나타내신다.
강사가 또박또박 설명을 하며 얇은 습자지를 나눠준다.
"평소처럼 편하게 천천히 성함을 써 보세요."
어르신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연필을 꾹꾹 눌러 이름을 쓰신다.
당신의 이름을 어떤 목적으로 쓰시는 일은 처음이라며 숫접게 긴장하신다.
"이거 아닌데, 왜 이리 삐뚤어. 종이 더 주세요."
"공책 하고 또 다르네. 나도 주세요."
여러 장의 종이를 받아서 세 글자를 쓰고 또 쓰신다.
고개를 갸웃갸웃하신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듯하다.
강사들은 글자의 크기, 자간을 살피며 도장에 들어갈 이름을 챙긴다.
"내 이름을 이렇게 힘들게 써 보기는 처음이네."
"도장으로 남는다니 잘 써야 하는데."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마저 조심스럽다.
숨을 고르고, 한 자씩 쓰고 멈추며 시간이 흐른다.
이름이 완성되면 습자지를 투명한 플라스틱 도장 위에 고정한다.
강사는 뾰족한 송곳 모양의 조각 도구를 들고 시범을 보인다.
손의 힘도 중요하지만 집중력이 더 요구되는 시간이다.
어르신들은 강사의 설명에 따라 꼼꼼하게 한 획 한 획을 눌러 새기신다.
"요만큼 깊게? 에구, 또 삐쳐 나갔네."
"손이 떨려, 좀 쉬었다가 해요."
강사들은 돌아다니며 글자의 깊이를 맞추고, 획이 겹치는 부분을 다듬는다.
당신의 이름 쓰는 일이 글자를 익히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평생 불려만 왔던 이름, 그나마 결혼 후에는 잊은 듯 살아온 말.
서류의 빈칸을 채우지 못해 남의 손에 맡겨야 했던 그 이름을 쓰신다.
당신들의 이름 석자 앞에서 느리지만 진지하게 손끝 힘을 주신다.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정성이 담긴 글씨다.
어르신들은 쓰신 이름을 보고 조심스레 다시 보신다.
강사분들의 도움을 받아 도장에 새겨진 이름은 그럴싸하다.
개성 있는 캘리그래피처럼 다양하다.
"야아, 내 이름이 이렇게 멋졌나."
"세상에 하나뿐인 내 도장이야!"
"오래 살다 보니 내 도장을 다 가져보네."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신다.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는 순간, 어르신들의 입가에 벙그레 웃음이 피어난다.
도장은 그동안 돌아보지 않은 삶의 일부를 정리하듯 도장통 안에 단정하게 담긴다.
어르신들은 네모진 도장통을 소중하게 어루만지신다.
"오늘 당장 은행 가서 이 도장으로 내 통장을 만들 어야지."
고운정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천 원이라도 시작하면 돼?"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이신다.
종이 위에 쓴 것이 아닌,
지워지지 않는다는 이름이란 것이 어르신들에게 새로운 감동이다.
이제는 어디든 내 이름이 필요할 때
선뜻 내밀 수 있는 자신감과 안도감이 자리 잡는다.
완성된 도장을 손에 쥔 순간,
여태껏 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소중함을 처음 대하는 뿌듯함이 어르신들의 얼굴에 곰상곰상 번진다.
작은 도장의 이름 안에는 어르신들의 긴 시간이 담겨 있다.
미루고 접어두었던 이름의 역사.
그 시간들을 넘어 어르신들은 비로소 자신을 불러낸 것이다.
'나는 이제, 나를 쓸 수 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인생 어느 자리에도 분명하게,
나를 보일 수 있다는 마음이 우뚝 서게 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