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간다
인천공항 출국장 앞에 서서 잠시 멈춰 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실제인지, 아니면 고시원 책상에 엎드려 꾸는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섯 번의 실패와 정확히 1,825일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이제야 여행 통장을 들고 공항에 와 있었다.
"이 길이 맞는 걸까?"
고시원을 나선 지 일주일 만에 스페인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가족들은 모두 걱정했다. 그들은 내게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다음 진로를 생각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5년을 기다렸어요. 더는 미룰 수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모아온 여행 자금이 통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래된 여권을 들여다보며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여권 사진 속 스무 살의 나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수의사가 되는 꿈 말고, 그 이면에 있던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출국 심사대를 통과하며 생각했다. 나는 결국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본래의 길로 돌아온 것일까?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5년간 나를 가두었던 고시원의 좁은 창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자유로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실패해서 떠나는 게 아니야."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공부에 쏟았던 5년의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선택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책에서만 보았던 구름 위의 세상을 경험하는 동안, 나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펼쳤다. 고시원을 떠나기 전날 서점에서 충동적으로 구입한 책이었다.
"여행이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것이 왜 그토록 두려웠을까? 나는 왜 안전한 틀 속에 갇혀 있기를 고집했을까? 수의사라는 꿈 자체가 아니라, 그 꿈이 주는 안정감과 명확한 방향성에 집착했던 건 아닐까?
책을 읽으며 과거를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강아지의 죽음이 내게 준 충격과 그로 인해 생긴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고시라는 길. 그리고 다섯 번의 실패.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나를 지금 이 자리로 이끌었다.
김영하는 책에서 말했다. "여행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수의사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니었다. 이제 나의 질문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로 바뀌어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옆자리 승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으로 사업차 가는 중년 남성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실패를 너무 두려워해요. 하지만 제 경험상 가장 큰 실패는 도전하지 않는 것이었죠."
그의 말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나는 정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다섯 번의 시도 끝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인가?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미로와 같아요. 때로는 뒤로 돌아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죠."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고시원에서의 5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고독과 좌절을 견디며 나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남들과 비교하며 자책하는 대신, 내 속도로 나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잠시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첫 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의 충격,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며 느꼈던 불안, 세 번째 시험에서의 자신감과 네 번째 시험에서의 절망...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시험. 그 모든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낯선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의사라는 꿈 뒤에 숨어있던 진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
비행기가 구름 위를 날아가는 동안,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끝없는 하늘과 구름만이 펼쳐져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던 지난 5년과는 다른 광활함이 그곳에 있었다. 문득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간다."
나는 노트에 이 문장을 적었다. 다섯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이것이 포기가 아니라 용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제 곧 스페인에 도착한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나 자신과의 만남. 모든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페인의 대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붉은 지붕들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오래된 그림 한 장처럼 아름다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안에 깊이 숨겨져 있던 또 다른 꿈을 찾아가는 여정.
귓가에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잠시 후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기내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은 짐을 정리하고, 안전벨트를 매고, 도착을 준비했다. 나 역시 책을 접고 가방에 넣었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미세한 충격이 전해졌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 나아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계속 나아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