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험 성적표를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다섯 번의 실패 끝에 다다른 이 순간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 같은 가벼움이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교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5년간 함께한 책들은 이제 누군가에게 새로운 꿈이 될 것이다.
"정말 그만두는 거야?"
같은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만둔다는 말도, 포기한다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포기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사전적으로 포기는 '더 이상 희망이나 기대를 버리고 단념함'이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내게 포기란 무엇이었을까? 이 길을 벗어나는 것이 정말 포기일까? 아니면 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일까?
어릴 적 강아지의 죽음이 내게 수의사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그 꿈은 오랫동안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고, 나는 그 꿈을 위해 기꺼이 고독과 인내의 시간을 감내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나는 여전히 동물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수의사가 되어야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원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왜 포기를 실패와 동일시할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다가, 그 과정에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놓치는 건 아닐까?
포기라는 단어 대신 '선택'이라는 단어를 써보았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 순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포기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가능성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시작.
짐을 정리하며 책장 뒤에서 발견한 여행 통장. 아버지가 내가 성인이 되면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던 그 통장이 아직도 있었다. 그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모은 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잊고 있었던 또 다른 꿈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의사가 되는 것만이 내가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동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른 방식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책상을 둘러보았다. 5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공간을 떠나는 것은 분명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포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용기였다. 하나의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는 용기.
다음 날 아침, 나는 고시원을 나섰다. 가방 속에는 여행 통장과 여권만 들어 있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포기가 아닌, 다른 꿈을 향한 첫걸음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