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코칭
‘아이의 실망 앞에서 나는 왜 늘 말이 먼저 나갔을까?’
매주 수요일은 나비코치 강의를 듣는 날이다. 처음 이 강의를 추천받았을 때, 나는 나비코치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강의를 듣기만 해도 삶의 태도가 달라질 거라는 지인의 말에 무턱대고 지원서를 냈었다. 1년 과정으로 입문반을 거쳐 지금은 심화과정을 배우고 있다.
어제는 감정코칭에 대해 배웠다. 감정코칭은 아이의 감정을 ‘고쳐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무엇인지 보아주고, 들어주고, 회복을 돕는 과정이다. 상처 난 마음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아파하고 있는지 아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부모가 먼저 반응하지 않고, 말보다 마음을 먼저 바라보는 태도가 핵심이다.
어제 감정코칭 5단계를 배우는 수업 시간에, 강사님은 한 편의 짧은 영상을 보여주셨다.
블록을 쌓아 올린 뒤 중간을 빼는, ‘젠가’ 게임이었다. 아이에게는 15분 안에 성공하면 작은 선물을 주기로 약속했고, 실패하면 아무 보상도 없었다. 아이는 집중하느라 긴장했고, 마음대로 되지 않아 실망했고, 다시 해보려는 의지 속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아이의 표정, 손끝, 숨까지도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장면 속에서 부모들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등장했다.
감정코칭을 배우는 입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묵직했다.
첫 번째는 축소·전환형 부모였다.
어떤 부모는 아이의 실망을 ‘별일 아니야’라고 축소했다.
“그 정도 가지고 왜 그래? 다시 하면 돼.”
말은 다정했지만, 아이의 마음은 인정받지 못했다. 슬픔과 속상함은 ‘별것 아닌 감정’이 되고, 아이는 그 감정을 안으로 밀어 넣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두 번째는 억압형 부모였다.
그들은 감정보다 결과를 우선했다.
“울지 마. 지금은 집중해야지. 감정은 나중에.”
문제 해결에는 빠를지 모르지만, 아이는 ‘내 감정은 틀렸나?’ 하는 혼란 속에서 더 조급해진다. 감정을 통제하는 법은 배울지 몰라도, 감정을 이해하는 법은 비어 있었다.
세 번째는 방임형 부모였다.
개입하지 않지만,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해.”
표면적으로는 존중처럼 보이나, 정서적으로는 아이가 홀로 남겨진다. 방향도, 위로도 없이 감정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은 생각보다 외로웠다.
마지막은 감정코칭형 부모였다.
이 부모는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많이 속상하지? 성공하고 싶었는데 잘 안 돼서 실망됐구나.”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해볼래? 네가 할 수 있도록 내가 여기 있을게.”
단순한 위로나 응원이 아니라, 감정이 회복될 때까지 함께 머물러주는 태도였다.
그 안정감 안에서 아이는 다시 시도할 용기를 되찾았다.
영상을 보고 난 뒤, 내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나는 그동안 상처 주지 않고, 따뜻하게 말하는 것만이 좋은 부모라고 믿었다. 따뜻함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따뜻함은 기본이지, 완성은 아니었다.
그 말들이 위로라고 믿었지만, 어쩌면 아이의 감정이 흘러나올 공간을 막고 있었던 건 아닌지 뒤늦게 돌아보게 되었다.
감정코칭은 기술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방치하지 않고,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일.
그 단순하지만 어려운 일이야말로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힘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강의실에서는 그저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야 내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음을 알았다. 나는 감정을 너무 오래 ‘관리해야 하는 것’으로만 여겨왔던 것 같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어준다는 일이 얼마나 깊은 일인지, 이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내 삶의 대부분은 가족을 돌보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에 맞추어 애쓰고 뛰고 버티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감정보다는 ‘해야 할 일’이 앞설 때도 많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되고 집을 떠난 지금에서야,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소중한지 새삼 배우고 있다. 마치 뒤늦은 숙제를 받아 든 사람처럼, 나는 지금에서야 감정을 건네는 법을 다시 익히고 있다.
그래서 이 배움은 더 이상 나 개인에게만 머물 수 없다고 느꼈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어주고, 그 마음을 조용히 바쳐주는 사람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내가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누군가에게 ‘작은 지지대’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 삶의 2막은 누군가의 슬픔을 축소하지 않고, 실망을 재촉하지 않고, 감정을 잠시 품어주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코칭의 배움을 사회봉사로 이어가고 싶다. 함께 앉아 있는 단 10분이, 건네는 단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늦게 배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었기에, 오히려 내 삶의 후반부가 더 깊고 넓어질 거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는 이제 확실해졌다.
누군가의 마음 앞에 조용히 앉아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감정코칭 수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