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이 문장의 무게가 더 깊게 와닿는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놓이고, 그 관계가 나를 만들고 또 바꾸어 왔다. 누구와 이어지고, 누구와 멀어지고, 누구와 조심스레 거리를 두게 되는지.. 인생의 많은 순간은 관계의 방향에 따라 흔들린다. 나는 그런 관계를 늘 소중하게 여겨왔고, 그 소중함 때문에 더 애쓰며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군가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상대가 필요하다면 내가 조금 더 하면 되지’,
그런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여왔다. 배려는 나에게 규칙이 아니라, 살아오며 몸에 밴 하나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내가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 일들이 과연 상대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상대가 바라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만 마음을 쏟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질문은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렀고, 답을 찾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둘째 형님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다. 가족이고, 정이 있는 사람이며,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취향과 성향을 아는 사이였다. 나는 형님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이나 부탁에 늘 마음을 써서 반응해 왔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우면 관계는 더 단단해진다고 믿었다. 형님은 사람을 미워하지도, 특별히 챙기지도 않는 선한 성격이었지만 말은 다소 가볍고 정성의 무게를 크게 느끼지 않는 편이었다. 내가 시간을 들여 챙겨준 일도 그분에게는 별것 아닌 일처럼 흘러갔다.
“아, 그거? 뭐 그런 걸 다 했어?”
그 말은 악의가 없었지만 내 마음이 담겨 있던 만큼 작은 상처가 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애썼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세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형님을 챙기고, 반응을 확인하고, 혹시 서운하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년 겨울, 형님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조금 멀리해 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반복되는 마음의 무게가 한 번쯤 내려놓고 싶은 정도로 차올랐던 것이다.
나는 아주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먼저 움직이던 습관을 멈췄다. 챙기지 않고, 맞춰주지 않고, 그저 나의 일상에 조금 더 집중했다. 그랬더니 관계는 놀랄 만큼 쉽게 거리가 생겼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 형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관계는 내가 잡고 있었던 것이구나.”
그동안 서로가 이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한 손으로 기대고, 다른 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던 관계였다. 그 깨달음은 처음엔 허무했지만 곧 마음을 가볍게 했다. 내가 힘을 주어 붙들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스러운 자리를 잃고 있었던 것임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형님을 미워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저 ‘우리가 지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거리’가 그 정도였던 거다. 그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니 형님도 나도 무리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형님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나는 관계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 나는 그렇게 애썼을까? 왜 그렇게 노력해야만 관계가 유지될 거라고 믿었을까? 돌아보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정작 내 마음은 종종 뒤로 밀려나 있었다. 내 시간을 쓰고, 내 마음을 쓰며 관계를 지탱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관계는 한쪽의 힘으로만 서 있는 구조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편안히 놓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오래 이어진다. 그 편안함이 사라지면 아무리 붙잡아도 관계는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형님과의 일은 그 사실을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깊게 가르쳐준 경험이었다.
형님과 거리를 둔 뒤로 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를 만나도 너무 서둘러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내가 먼저 움직여 관계를 이끌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닫아놓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졌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편안하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조금 불편하면 그 불편함을 억지로 덮어두지 않는다. 관계의 속도가 급해지지 않게,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만큼만 다가가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켜본다. 그렇게 하니 머물 사람은 조용히 머물고, 멀어질 사람은 가볍게 멀어진다. 서운함도 없다. 그냥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이다.
이제 나는 관계의 시작과 끝을 예전처럼 무겁게 바라보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지 않고, 나를 탓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서로 다르게 살아왔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관계가 멀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형님과 함께했던 시간을 여전히 따뜻하게 기억한다. 그 기억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단단해졌으니까.
사람 사이의 일은 붙잡는다고 이어지지 않고, 놓아버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각자가 편안한 자리로 조용히 흘러갈 뿐이다. 나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관계를 억지로 만들지 않되, 스쳐간 인연도 소중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내가 서 있을 자리를 평온하게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관계를 바라보게 되자 내 삶은 조금씩 단정해지고 마음에는 조용한 따뜻함이 스며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