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연

돌아오는 길에야 알게 된 것

by HB

잠실 롯데월드 3층 ‘금아 피천득 기념관’에서 열린 정기총회 및 신년 하례식회에 다녀왔다. 이렇게 문장으로 쓰고 나서도 한 번 더 읽게 된다. 아직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들어온 문장은 아니라서이다. 내가 이런 자리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일이 지금의 나에게는 여전히 조금 낯설다.


사실은 아침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일반회원으로 이름을 올려 두기는 했지만, 그 사실만으로 이 자리에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한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지인과 함께 한 번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때도 나는 이 모임에 대해 명확한 기대나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피천득 선생님을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는 기억은 있었지만, 특별히 동경해 온 작가도 아니었고, 기념사업이나 문학 단체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작년 11월, ‘피천득 다시 읽기’라는 강연이 있어 우연히 그 자리에 갔고, 그 인연으로 회원등록을 했을 뿐이다. 오늘이 그 이후 첫 공식 모임이었다. 그래서 마음 한 편에서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내가 여기에 가서 할 일이 있을까’

‘굳이 이 낯선 자리를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오늘이 연초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올 해의 첫 새로운 모임이라는 점이 나를 붙잡았다. 이 자리를 피하면, 괜히 올 한 해의 시작이 흐트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결국 외투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계속 오락가락했다. 그러다 보니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잠실이라는 지명도, 롯데월드라는 공간도, 그 안에 있다는 기념회관도 모두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이동의 시간은 늘 나를 조금 더 솔직하게 만든다. 괜히 가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런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가도 이미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앞으로 밀었다.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긴 어디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공간은 단정했고 사람들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인사말이 오갔고, 웃음도 자연스러웠다. 난 그 사이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신입 회원이 열네 명 정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숫자로는 분명히 소속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게 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그런지 빠르게 공통점을 찾았다.


행사가 끝난 뒤, 몇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가 차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대화는 조금 더 편안해졌고, 조금 더 깊어졌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 글을 쓰게 된 계기, 요즘의 마음 상태 등을 나누었다. 글이 버거워진 시기와 그러나 여전히 글이 유일한 숨구멍이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들이었다.




이 모임이 좋았던 이유는 다른 목적이 앞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모인 자리라기보다, 글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연결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특별한 역할은 없다는 것, 지금의 나는 그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조심스러움도 남아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만남에는 늘 좋은 점과 함께 부작용도 따라온다. 가까워질수록 기대도 생기고, 실망도 생긴다. 글로 엮인 관계는 특히 그렇다. 문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드러내고, 삶의 결은 숨길 수 없이 비친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만남이 마냥 들뜨기보다 조심스럽게 좋았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앞으로 이 모임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오래갈 수도 있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흩어질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오늘 나는 새로운 인연 몇 사람을 만났고, 그 만남이 생각보다 따뜻했다는 사실이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피천득 선생님의 문체가 떠올랐다. 크지 않은 일상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던 글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결론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았던 문장들. 어쩌면 오늘 하루도 그런 하루였는지 모른다. 특별하지 않지만, 그냥 지나가게 두기에는 아까운 하루였다. 새해의 시작은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낯선 자리에 한 번 앉아보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그 선택을 했다.


그것으로 이 하루는 충분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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