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스며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냉장고 정리를 하면서 문 안쪽 선반에 밀려 들어가, 잘 보이지 않던 음료 몇 병을 발견했다. 도대체 언제 사다 놓은 것일까. 병 바닥을 들어 유통기한부터 확인했다. 거의 다 되어 가는 두유와 각종 주스였다. 순간 화들짝 놀랐다. 급히 꺼내 정리하면서, 이런 것들이 냉장고 안에 여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생각은 오래전으로 돌아갔다. 유난히 무덥던 여름날, 대림에서 화장실 케어를 위해 기사 두 분이 방문했다. 작업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공간 특성상 문을 닫은 채 청소를 해야 했기에, 집 안의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소용이 없었다. 문을 닫고 청소를 마친 두 사람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곧 갑니다. 죄송합니다." 숨을 고르며 말하던 젊은 기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아이패드에 사인을 하며, 마침 오븐에서 구운 고구마를 꺼내던 참인데 먹겠느냐고 물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주시면 너무 감사합니다'라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얼른 고구마 몇 개와 시원한 생수 그리고 음료 몇 병을 챙겨 건넸다. 환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함께 밝아졌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에 오는 사람에게는 뭔가 하나쯤은 손에 쥐여 보내게 되었다. 어디를 지나가다 시원한 음료가 눈에 띄면 몇 병씩 사두었다. 냉장고 한쪽에는 늘 누군가에게 건넬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번거롭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언제라도 필요해지면 꺼낼 것이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예전에는 정수기 코디네이터, 에어컨 점검 기사 등 이런저런 이유로 드나들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때는 약속 시간을 맞추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집안에 낯선 발걸음이 드나드는 풍경은 그저 일상이었다. 그러다 하나둘 계약이 끝나고, 대부분의 일들이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정수기 필터는 택배로 도착하고, 나는 혼자 갈아 끼웠다. 점검 일정에 맞춰 시간을 비워 두지 않아도 되었고,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냉장고 깊숙이 밀려 있던 음료 몇 병을 꺼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누군가를 위해 사두었던 것들이 건네지지 못한 채 냉장고 한편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변한 건 세상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한 집 한 집을 오가며 얼굴을 마주하던 방식은 어느새 조용히 사라졌고, 대신 택배 상자와 문자 알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불편함은 줄었지만, 그 자리에 무엇이 함께 사라졌는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문득 깨달았다. 편리함이 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다림과 맞이함 속에 담겨 있던 마음까지 덜어낸 건 아니었을까. 그때의 환한 웃음은 아직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마, 누군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나는 여전히 냉장고를 열게 될 것이다.
세상이 변해도,
그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