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하게 그 자리에 달라붙어 움직일 생각조차 안하는 것 같더니.
그 삼월도 끝을 맞았고 음력으로는 새 달을 맞았다. 그게 또 삼월이지만 말이다. 깊은 후회와 함께 땅을 치며 대성통곡한다는 걸 직접 겪었다. 사촌이 땅사서 배 아파 땅을 친다던데. 나는 그저 내 눈과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오롯이 내게만 응축되는 후회와 회한이었다. 사는 내내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던 인생 끝자락에서의 깊은 회한이라는 걸 서른아홉에서 맞게 된다니 도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죽는 게 나은 것이었다.'
굳어진 표정은 1mm도 펼 수 없었고 미세근육의 무게가 그리도 무거운 것이었는지, 그렇게도 십수 년간 바깥에서 표정관리하며 웃어대던 가면들은 다 어디에 버린 건지. 이럴 땐 내 새끼들한테 더 많이 웃어주는 '척'이라도 해주면 좋았을뻔했다. 그런데 그 척조차 안되더라. 그저 서있는 게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도 위로받을 수 없는 일이었고 위로받아서도 안되었으며 스스로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삶을 살았다.
이제 가족은 저만치 멀어져 갈테고 빚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저 처리하고 뒤치다꺼리해야 할 것들만 잔뜩 남겨놓은 서른아홉에의 인생은 참 하찮고 보잘것없었다. 십삼 년 전 그때에는 남겨질 엄마가 참 안쓰러웠다. 돌이켜보니 그래도 나보다 어른이었으니 어떻게든 살아내셨으리라. 나보다 구력이 있는 삶이니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십삼 년이 지나 또 나 때문에 아파할 사람들만 남아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만 믿고 세상에 나온 두 아이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나를 살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버겁다. 망가져버린 사람을 어떻게 다시 고쳐 쓴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연은 쳇바퀴 속에 매일을 헤매었다. 가능한 남편과 자식들을 위한 모든 것들을 해둔 뒤에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회피임을 안다. 가능한 깨끗하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하나를 치우면 다른 하나가 파고든다. 그게 인생임을 애초에 알았을 텐데 여전히 답 없는 인생에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는 도연의 고집을 보자니 퍽 한심하다. 그렇게 타고난 사람을 고쳐 쓸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럼 나의 모든 것을 죽여서 다시 시작하거나 뼈를 깎는 고통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 둘 중 하나일 테다. 도연은 한걸음 나아가기가 힘든 사람이다. 한걸음 나아가는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 왜 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하는 건지 한 다음엔 뭘 하는 건지 그런데 이건 지금 왜 안 되는 건지 내가 좋아서 하는 건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지 왜 나를 시키는지 그렇다면 나는 왜 저 사람이 하란대로 하고 있는 건지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건지 나는 저 사람보다 못한 사람인건지 나는 안될 년인 건지.....'
그렇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끊어내기가 어렵다. 동문서답은 기본이다. 누구는 신이 씌었다 하고 누구는 ADHD라 한다. 도연은 인생이 두렵다. 정말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자식들이 , 남편이 내 삶을 연명해주고 있다. 도연은 알고 있다. 수만 가지 생각들을 받쳐줄 정신력 체력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코드가 녹슬기 전에 도연은 레버를 내렸다. 그냥 잠정 휴식에 들어갔다. 그냥 지금만 생각하는 거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당장 5분 후에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만 생각하는 거다. 그래야 산다.
그렇게 젊은 시절 동경해 마지않던 스님들은 그러셨다. 내려놓으라 방하착 하라. 현재를 살라 지금을 살라. 죽어도 그렇게 되지 않던 도연은 이런 식으로 이렇게 급작스럽게 아무 생각 없이 현재만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살기 위해서다. 턱끝까지 차올랐다, 정신력의 한계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않을 3월이 흘러가고있다. 애증의 삼월, 지랄맞은 시간들을 보냈다는듯이 수분사이에도 변화무쌍한 마지막을 장식한다. 회오리가 쳤다가 눈보라가 날렸다가 구름이 싹 걷혀 거북이 구름이 생기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볼땐 다시 회오리 바람이 불고있다. 회오리가 걷혀 도연은 무념무상에 이르렀는데 그의곁을 지키던 영수가 심상치 않다. 온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자꾸 안하던 말들을 내뱉는다.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