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극영화를 찍으며 마주한 얼굴.
엄마가 말없이 바꾼 섬유유연제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옷장에서 꺼낸 옷을 입기 무섭게 곧바로 다시 벗어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딘가 비린 냄새가 섞인 향. 내가 매우 싫어하는 오이에서 나는 향이 옷에서 나고 있었다. 설마, 하고 최근 빨래한 옷들의 냄새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몇몇의 내 옷이 낯선 향을 뿜어대고 있었다. 결국 그날, 나는 계획에도 없었고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그 냄새’가 나지 않는 옷을 찾아 입고 밖을 나섰다.
“역겨워. 토할 것 같애.”
역시나 섬유유연제 향을 바꿨다는 엄마에게 다시 바꿔달라는 간청을 하며 덧붙였다. 엄마는 내게 충격적인 답변을 건네왔다.
“나는 너무 좋아서 앞으로 이걸로 정착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이 향을 좋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니. 엄마가 섬유유연제를 바꾸게 된 연유에 ‘좋아서’라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유유연제가 떨어진 김에 새로운 향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혹은 가격이 싼 섬유유연제로 바꾸고 싶어서. 정도를 상상했다. 이렇게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아니, 오이 냄새가 난단 말이야. 엄마 내가 오이 못 먹는 거 알지. 그 냄새가 나. 진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열과 성을 다해 그 섬유유연제를 혐오하는 나를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오이 향을 싫어하는 유전자가 있다던데. 나 빼고 모두 오이를 잘 먹는다. 나에게 있는 이 유전자는 어디에서 온 걸까.
외모 외에는 엄마의 유전자가 단 하나도 나에게 오지 않은 것은 아닐까, 늘 의심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빼다 박은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그 외에 엄마와 나는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주방에서 나는 냄새가 싫어 항상 방에 인센스를 피워 놓곤 했었는데 엄마는 그 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고 다 피울 때까지 방 문을 닫아 놓는 걸로 합의를 봤다. (역시나 향에 관한 취향은 특히 안 맞았던 것 같다) 엄마는 꽃과 화분을 좋아하고 무럭무럭 키워내지만 나는 식물을 돌보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 그중에서도 정말 서로가 달랐던 부분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였다.
내가 바라본 엄마의 삶은 그렇다. 목회자로서 건물을 짓겠다는 꿈을 가지고 돌진하는 아빠의 뒷수습은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점점 좁아지는 집과 어쩔 수 없이 남의 집에서 얹혀살게 될 때까지. 엄마는 아빠의 결정에 단 한 번도 반대 의견을 내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게 아빠의 뜻대로 흘러가는 우리 집의 이치가 싫었고, 그 불만족의 대상은 아빠를 너머 엄마에게 번졌던 거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나는 절대로 그렇게 못 살아.”라는 말에 엄마의 대답은 늘 같았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결정. 결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굳세었던 말이었던가. 엄마의 대답을 듣고도 결코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내가 25살이 되던 해, 엄마와 딸에 대한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되었다. 성향이 전혀 다른 엄마와 딸이 연애라는 공통된 지점으로 갈등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재미있는 소재가 떠올랐고,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해 제작지원을 받게 되었던 거다. 하지만 진짜 창작의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초고에서의 문제점과 부족한 점을 보완해 완고를 내어야 영화를 찍을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걸려버린 것이다. 나는 제작지원을 받아버린 과거의 운을 저주하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깜빡이는 문서창 속 커서와 함께 매일을 죽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죽고 싶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말라갔다는 것이 맞겠다.
화분마다 물 줄 시기를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돌봐왔던 엄마에게 시들어가는 내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엄마는 어느 날 ‘잘 되어가냐’는 한마디로 말을 걸어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하고 있어.’라는 말로 넘어갔을 테지만, 그때는 나도 하나의 물줄기가 절실히 필요했던가, 엄마에게 힘든 점을 털어놓고 말았다. 가만히 내 하소연을 듣던 엄마는 나에게 어떻게 물을 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야기 하나를 꺼내어 본다.
미란의 엄마는 내 시나리오 속 엄마 캐릭터처럼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다만 시나리오 속 주인공과 달랐던 점은 아이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라는 점이었다. 미란의 엄마는 세 명의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하나의 생존수단으로 연애를 했던 것이 아닐까, 미란은 생각했다. 생활비를 지원해 주고 집을 구해준 당시의 연인에게 연인으로써는 행해져서는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면서도 관계를 이어나갔던 엄마의 모습이 미란의 기억 속에 남았기 때문이다. 첫째였던 미란은 말라가는 엄마 대신, 또 다른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다. 미란은 매일 동생들의 도시락을 챙겨주며 학교를 보내는 학생으로 자랐더라는 이야기였다. 미란은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미란이 학창 시절을 조금 더 유복하게 보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미란과는 다른 미란이 되었을까.
엄마가 평생을 걸쳐 찾아냈다는 향의 섬유유연제는 거의 쓰지도 않은 채로 화장실 구석에 방치되었다. 방치된 섬유유연제를 보며 그동안 엄마가 해줬던 셀 수 없는 빨래의 횟수를 생각한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빨래는 엄마의 몇 번째 빨래일까. 또 다른 향을 내뿜으며 돌아가는 세탁기는 10년이 넘어도 잘만 돌아간다.
“그래도 한 번은 입고 다시 빨아. 아까우니까.”
섬유유연제가 화장실 구석으로 밀려난 것이 억울한지 약간의 심술을 섞어 말하는 엄마의 말에 이미 세탁된 옷들은 ‘한 번 입었음’으로 처리해야 했다. 빨리 처리하자,라고 생각하곤 그 옷을 입고 애인에게 간 날 애인은 냄새를 맡아보더니 향이 좋다고 말했다. 나와 있을 때의 모습만 볼 수 있기에 잊고 있었지만, 애인은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하며 살고 있다니. 징그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다시 맡아보아도 그 섬유유연제의 향은 여전히 역했다. 하지만 처음 그 향을 맡았을 때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오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