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라는 힘. 사실 미란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빨간색 캐리어의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캐리어를 끌고 있는 손은 쭈글쭈글하지는 않지만 생활의 노하우가 담겨있는 야무진 중년의 손이다. 쫙 빠진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에 긴 치마. 아마도 제품의 심미성 보다는 기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진 듯한 운동화가 바쁘게 길을 걸어간다. 매끈하게 포장되어 있지 않은 도로에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미란의 귓가를 때리기 시작한다. 때문에 미란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모님!” 다시 한 번 소리를 높여 부르는 말에 미란은 그제서야 뒤를 돌아본다. 미란의 교회 바로 옆 집, 오후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오래된 꽃집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멈추어선 미란을 걱정스럽게 훑어보기 시작한다.
“어디 가셔요..! 집…. 나가셔요..?!”
미란은 ‘사모님’이라고 불리우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미란의 남편 직업이 목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란을 목사님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교회와 일절 인연이 없는 꽃집 사장님도 예외는 없다. 미란은 그렇게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갔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기 전, 미란은 선생님으로 불리웠다. 미란과 같은 또래의 여성들은 어린이집 선생님인 미란에게 아이 양육에 대한 노하우를 묻곤 했다. 그때마다 미란은 열심히 배웠던 내용과 어린이집에서 근무했던 노하우로 친절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미란은 엄마로서의 노하우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미란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란의 아이는 미란이 선생님이 아닌 사모님으로 불리우고 나서 생겼다. 남편과 결혼 후, 어린이집 선생님을 관두고 함께 교회를 차렸다. 그리고 나서 두 딸을 낳은 거다. 어느덧 둘째 딸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고, 미란은 어느 오래된 꽃집 옆에 교회를 옮긴지 4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동네에 오래된 꽃집만큼 유일한 듯 보였던 한 교회의 사모님이 아침부터 빨간 캐리어를 들고 서두르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매주 토요일이면 목사님 남편과 함께 커피 봉사를 하고 다녔던 사모님이 캐리어를 끌고 급하게 집을 나오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미란은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꽃집 사장님이 사모님을 불러세운 그 날, 그제서야 미란은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것이다.
미란은 캐리어를 끌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미란은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탄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사람들에게 치어도 캐리어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지방의 한 대학교다. 미란은 대학교 어느 강의실에 도착해 그제서야 캐리어를 연다. 미란의 빨간 캐리어에는 5권은 족히 넘는 두꺼운 전공 서적들이 쌓여있다. 그 중 한 권을 꺼내 펴내면, 교수님이 들어와 출석을 부르고 강의를 시작한다. 강의 이름은, 사회복지론이다. 미란은 수업 이수를 위해 매주 캐리어를 들고 뛴 거다. 무거운 전공 서적들을 들고 다니긴 너무 무거워 캐리어에 넣어 뛴 거다. 미란은 그렇게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냈다. 그리곤 교회의 1층, 지역아동센터를 차렸다. 이제 미란의 호칭은 하나가 더 늘었다. ‘센터장님’. 미란은 이제 주중에는 센터장님으로, 주말에는 사모님으로 불리운다. 미란의 뜀박질로 얻어낸 새로운 호칭이었다.
2025년, 미란의 둘째 딸은 26살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미란은 환갑을 넘어섰다. 이제는 베테랑 센터장님이 되어 3명의 직원이 있는 제법 큰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와 같은 건물, 4층에 있는 미란의 집에서 둘째 딸이 서둘러 내려온다. 사내 방송 촬영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서다. 아직 잠을 잘 이기지 못하는 둘째 딸은 매주 8시 출근인 아르바이트에 항상 뛰어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뛰어가서 밟는다. 15년동안 미란이 모은 돈으로 사준 천 만원짜리 중고차의 페달을 밟아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 도착한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둘째 딸은 오전 내내 연출부 일을 한다. 방송 촬영이기 때문에 매번 끝나는 시간이 다른데, 요즘은 방송 개편 때문에 특히 늦게 끝나는 듯 하다. 촬영이 12시가 넘어가면, 둘째 딸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1시 반, 용인의 대학에 수업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1시에 끝나버린 촬영에 둘째 딸은 또 다시 밟는다. 학교를 향해. 이미 수업 시간에는 1시간이나 늦었지만 차에서 내려 다시 강의실로 뛰어 들어간다. 늦게 도착해 앉은 가장 뒷자리, 둘째 딸은 가빠진 숨을 고르며 한 발 늦게 수업 내용을 따라간다. 4학년, 마지막으로 찍을 졸업 영화 자금 마련을 위한 뜀박질이다.
어느 날, 다름없이 수업에 지각해 가만히 수업을 듣던 둘째 딸은 문득, 어릴 적 보았던 미란의 캐리어를 떠올린다. 캐리어를 들고 뛰어가던 미란의 모습을 떠올린다. 집을 나간다고 오해를 받을 뻔 했다며 깔깔대면서 말하는 미란의 모습도. 그리고 상상한다.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강의실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수업을 준비했을 미란의 모습을. 자신이 엑셀을 밟아 자동차 바퀴를 굴리듯, 손수 뛰어 캐리어 바퀴를 열심히 굴렸던 미란의 모습을. 그렇게 미란이 따낸 센터장님이라는 호칭을. 셈을 세어본다. 아마도, 2010년 쯤이었을 거라고. 감독이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 매주 뜀박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둘째 딸은 몰래 웃음짓는다.
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미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딸은 자신이 알려준 게임을 하며 TV 앞에 앉아있는 미란을 본다. “잘 갔다 왔어?” 묻는 미란을 본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듯 대답하며 미란을 지나쳐 침대에 누워버리는 둘째 딸은 괜히 저 혼자 미란과의 유대가 깊어진다. 가만히 누워 엄마를 떠올리다 언젠가 엄마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 다짐한다. 어떤 날은 그렇게 혼자만의 상상으로 엄마와의 거리를 좁혀갈 때가 있다. 상상은 그러한 힘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 가닿지 못한 어떤 이의 빈 곳을 저 마음대로 채워넣는 것. 채워넣음으로써 이해하는 것. 아주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그러나 사랑스러운 연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