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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타인이 더 익숙하기에 외로운 걸지도 모르겠다.

by 장희은





엄마로부터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졌다. 애써 모른 척하려는 때, 다시 한번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애인의 말에 세 번째 전화를 무시하지 못했다. 지금 이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날이 선 말투로 받은 전화 너머로 엄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데이트를 뒤로 하고 향한 집 앞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주말 저녁, 전화 너머 갑자기 들려온 엄마의 부탁은 운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로부터 최근 바꿔준 TV가 너무 커서 마음에 들지 않으니 빨리 다시 작은 크기로 바꿔달라는 부탁을 받았더란다. TV를 옮기려면 차가 필요했고, 아빠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갑작스러운 부탁인 데다가 애인과의 약속까지 취소해야 했던 나는 잔뜩 짜증이 난 채로 엄마를 마주했다. “아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서 안 도와준대?” 꽤 신경질적인 물음이었다. 엄마는 화가 났는지, 미안한 건지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스레 짜증을 내었던 말이 미안해져 말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아빠가 요즘 마음이 안 좋아.”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차 안, 적막을 깨고 엄마가 말을 건네왔다. 엄마의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왜 더 좋은 TV를 놔두고 작은 TV가 좋다며 바꿔달라고 닦달하는지, 할아버지 일인데 아빠는 왜 도와주지 않는 건지, 엄마는 왜 지금 이 시간에 군말 없이 혼자 바꾸러 가는 건지. 그렇게 무거운 공기를 안고 도착한 할아버지 집에서 엄마는 무거운 TV를 받아 차 뒷자리에 실었다. 엄마에게 닦달했다던 할아버지는 막상 나와 엄마가 도착하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TV를 건넸다. 그렇게 다시 엄마와 나는 무거운 공기보다 더 무거운 TV를 싣고 마트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왜 지금 바꿔달라는 거야, 갑자기?” 내 수많은 의문들 중 하나를 꺼냈다. 답답했다. 지금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유, 운전대를 잡고 향하고 있는 곳에 대한 의문들에 더욱 화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 물음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보다 엄마가 더 답답하겠지. 생각하던 중, 엄마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 전, 장을 보러 가던 도중 엄마가 목격했던 건 할아버지의 불륜이었다.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할아버지는 특히 잠귀가 밝았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꽤 오래전, 할머니와 따로 떨어져 살기 시작했고 점점 우리 가족과 독립되어 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혼자 이사 간 집 주소를 엄마, 아빠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따로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중, 혼자 장을 보러 가던 엄마는 할아버지가 낯선 할머니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둘의 거리는 많이 가까웠고, 처음에 엄마는 외면했지만 이후 몇 번이고 둘의 모습을 더 봤더란다. 결국 엄마는 아빠에게 조심스럽게 사실을 알렸고, 아빠는 그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 할아버지에게 따졌다고 했다. 그런 아빠에게 할아버지는 ‘그냥 아플 때 챙겨주는 친구‘라는 말만 건넸다. 그 이후로 아빠는 할아버지의 연락도 받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모든 요구는 아빠 대신 엄마에게 대신 전달된 것이다. 혼자 지내고 싶었지만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집 주소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딱 맞는 크기의 TV가 필요했던 할아버지였다. 한 번 마음먹은 고집은 꺾지 않고 자존심도 절대 굽히지 않는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아빠였다. 한 번 어긋난 관계에 둘은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빠 말고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아빠한테도 말하지 말고.” 엄마는 내게 당부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후 우리는 할아버지와 아빠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 마트에 도착해 TV를 바꾸고, 약간의 장을 본 후 할아버지 집에 작은 TV를 내려주었다.





몇 달이 지나, 해가 바뀌고 설 명절이 찾아왔다. 고모네 가족이 집에 찾아오자 할머니와 함께 반기고 있던 도중, 집에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아빠를 살폈다. 그 찰나의 긴장감이 무색하게, 아빠는 할아버지를 웃으며 반겼다. 그리고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부를 물었다. 이후 살펴본 엄마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를 반기고 과일을 내왔다. 그렇게 몇몇만 알고 있던 내밀한 일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 보였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듯 보였다. 걸리는 게 없는 듯한 엄마와 아빠의 표정을 살핀 나는 그저 내가 모르는 사이 그들끼리 잘 해결되었나 보다, 추측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가족들의 사정을 묻기 시작했다. 3년째 직장에 다니고 있는 언니가 아직도 학생인 줄 아는 할아버지. 대학교 2학년이 된 사촌 동생이 아직도 미성년자인 줄 아는 할아버지였다. 마치 오랜만에 친구들을 본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과거 엄마가 바꿔온 TV를 받으며 멋쩍게 웃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보였다. 누군가의 챙김이 익숙하지 않은 미소. 그런 할아버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그 할머니. 왜 할아버지의 곁에서 할아버지를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 다른 할머니일까. 왜 아빠가 아니라 엄마일까.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가깝게 얽혀있는 이들이 아닌 거리를 둔 타인으로부터 받는 돌봄이 더 익숙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늘 외로웠는지도, 어쩌면 지금도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할아버지의 미소가 씁쓸하고도 고독하게 다가왔다. 타인이 더 익숙한 이유는 할아버지의 타고난 예민함 때문이었을까? 주소지를 숨기고 이사 간 집처럼 그 누구 하고도 일정의 거리가 필요한 것이었을까? 가까운 이들을 들이지 않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제야 겨우 알려진 아주 작은 집 주소가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는 할머니를 본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사실인 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우리 가족은 여느 가족과 다름없이 화기애애한 날을 보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나는 가족이었고, 그날은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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