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괜찮은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게 아닌가봐
지난 번에 계획했듯, 내 나름대로 방향성을 잡을 수 있는 질문들을 리스트업해두고 모교 취업 컨설턴트 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했다. 써놓은 직군과 할 수 있는 역량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해주신 다음, 컨텐츠를 잘 기획한다고 하는 건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흥미로워 하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셨다. 그리곤 대부분의 서양화과-순수미술대학 출신 학생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중심으로 만드는 것에 힘들어한다고 말하셨다. 선생님은 연달아서 역량 중에서 뭘 가장 못 놓겠는지, 뭘 가장 하고 싶은지를 연달아 물으셨다. 자신이 콕콕찌르는 질문을 하지만,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도 덧붙이셨다. “아직 자격증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고, 책을 읽지만 많이 읽진 못하고, 영상을 만들 줄 알지만, 잘하지는 못하고, 글을 꾸준히 쓰지만 모두 이웃공개예요.” 라고 말하니 선생님께서 웃었다. 아마도 그 웃음이란 컨설팅하기 막막한 학생을 보고 하는 수 없이 새어나오는 헛웃음일테다. 치욕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한참을 답지 않게 우물쭈물 하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선생님, 사실 제가 작년까지 거의 15년을 미술 작가를 꿈꿨는데, 대학원, 인턴, 전시공모 모두 떨어지고 나서 잠깐 올스톱한 상황이에요. 그냥··· 작업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어떤 곳이어도 좋으니 빨리 취업하고 싶은 생각만 있어요. 선생님도 지금껏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그렇다할 특기도 스펙도 없고요." 그리곤 울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서 여태껏 잘 참아왔는데, 좋아하고 나름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만두었단 이야기를 하며 울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선생님은 상담 내내 좁히려고 하시던 것과 달리 그렇담 정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짧게 말해주셨다. 가장 가까이서 전시가 진행될 수 있게 기획하고 설치하는 업무를 준비해보자고. 그렇게 가까이서 지내다보면 기회가 오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렇게 상담이 종료되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주변 친구와도 이야기 해보며 미술과 관련있는 직종으로 가는 것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왜 이토록 구부정한 마음인지는 설명 못하겠다.
내 얘기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
늘 쉽게 울상이 되는 것은 늘 엄마와 아주 일찍 헤어졌다는 사실 하나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딸의 안위를 살펴주거나, 걱정하거나, 행복해하는 늙은 중년의 여성이 없다는 사실.
요 며칠 전 티브이에서 어떤 할머니가 우연찮게 아흔 노인이 되어서도 엄마가 보고싶다고 말하는 순간을 봤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이제 스물 여섯을 넘겼고, 엄마를 보지 못한지 17년이다. 앞으로 60년 넘게 엄마에 평생 슬퍼하며 울다 지치고, 그리워해야 한다니. 사무치도록 두려워서 자신이 없어졌다.
비빌 수 있는 언덕이라는 게 내 팔자에서는 엄마였나보고, 전생에 무슨 원죄를 저질렀는지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 된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참. 오늘도 슬픈 날이다. 오늘 고민은 평생을 남자로 살아온 아빠보다 엄마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데. 엄마, 나 어떻게 해야할까? 엄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엄마는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어? 닿을 수 없는 질문. 가끔 엄마가 소중한 딸내미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고 화내주는 상상도 생각하다가, 그러게 좀 살길 마련 좀 하지 그랬냐며 꾸짖는 상상을 한다. 엄마가 어떤 표정일지 모르니까.
사는게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선택하지 않고 얕고 넓은 발뿌리로 세상에 퍼뜨려져 있다. 뭉개진 스스로를 발견할 때 마다 엄마와 아빠가 절반씩 나를 이루고 있다는 확신을 되풀이한다. 분명 엄마라면 우는 내 얼굴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또 괜찮다고 다독일 것도. 난 아빠를 닮은 만큼이나 엄마를 닮았으니까, 엄마의 피는 내 안에서 심장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이 태어나고 있으니까.
엄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엄마라면 어떻게 살고 싶어? 자유롭게, 남 괴롭히지 말고. 이미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는 건 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