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의 모든 경은이에게

by 명희진

나에게는 다섯의 조카들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이모이면서 동시에 고모이다.

언니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고 남동생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다. 그러니 나는 셋의 이모이면서 둘의 고모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이모(지극히 개인적 생각일 수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본다)가 그렇듯이 나는 언니의 아이들과 가깝다. 그리고 어쩌면 다수의 고모가 그렇듯이 남동생의 아이들과는 가깝지 않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고 나도 낯을 가리는 사람이 돼버려서 조카를 만나는 일에도 불편함이 따르면 자꾸 피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좋은 고모는 아닌 것 같다.


어제도 독일에서 유학 중인 조카와 통화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이모와는 잘 지내는데 고모와는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의 이모는 결국 누군가의 고모일 텐데...”

나에겐 이모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엄마에겐 배다른 동생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을 가족의 범위에 넣지 않는다. 그러니 나에겐 이모가 없다. 또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고모들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우리는 보지 않는 사이가 됐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일을 다 잊은 건 아니다. 당시 고모들의 나이가 되면 그들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그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 됐다. 그때의 그들의 나이가 될 때까지, 그 감정을 유보했던 걸로 충분하다. 그거면 됐다.


각설하고 지금은 조카들이 언니보다 나와 더 가깝다. 한국에 가면 조카들은 나와 보내려 시간을 비운다. 우린 맛집을 알아보고 영화를 함께 보고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떤다. 그중에 첫째와 정말 가까워서 이제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서로에게 집중한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부터 나는 해외를 떠돌았고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영영 해외에 살게 됐다. 그래서 우리에게 얼굴을 보는 시간은 무척 소중하다.


언니의 지인이 언젠가 이런 이모가 있다고 신기해한 적이 있다. 스무 살의 우리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지만, 우리에겐 기댈 어른이 없었다. 삶을 어떻게 가꾸라는 조언을 주거나,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는 클리셰 같은 말을 하는 어른도 없었다. 고모나 작은 아버지는 우리에겐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우리를 적대시했다. 우리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작은 어머니는 내 친구들에게 군인들과 소개팅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며 친구들의 연락처를 물었다. 작은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장례 후에 제일 먼저 한 건, 할아버지 이름으로 된 땅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증여하는 거였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언제나 고향에 가서 사는 꿈을 꾸곤 했다. 우리는 슬픔을 가눌 새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가장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이 끝난 늦은 밤이면 나는 책을 읽었다.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갔고 이십 대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겼다. 나는 일이 끝난 밤 9시 이후에나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가난을 감추려 무던히 애쓰던 때였다. 그때 나를 지탱한 건, 소설이었다. 나도 왜 그렇게 많은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소설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읽으면 말하고 싶고 말하다 보면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더 좋아하는 소설책이 생겼고 소설가가 생겼다. 그들의 이야기를 쫓으며 나는 지금에 왔다. 지나고 보니 인생의 고비를 지날 때마다 내 옆에는 좋은 현자들이 있었다. 가깝던 친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나를 떠났지만, 이야기는 나를 떠나지 않고 꽉 잡아줬다. 내가 읽은 이야기가 빛을 발한 건 여행을 할 때였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갈 때, 나는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많은 것을 느꼈다.


언젠가 조카가 물은 적이 있다.

"이모가 기획사 사장이면 아이돌이 될 연습생 친구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거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양질의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할 거라고 했다. 그러자 조카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안다. 누구나 인생에 크고 작은 걸림돌과 마주한다는 걸. 돌아갈 수 있으면 좋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럴 때마다 좌절할 수는 없다.

화려함 뒤에는 어둠이 있고 시끄러움 이면에는 고요가 있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만날 일도 없는 나의 연습생들이 어둠과 고요에 홀로 섰을 때, 그 길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조카들이 홀로 낯선 곳에 섰을 때, 문화를 친구로 삼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브런치 북에는 조카와 함께 읽은 책, 영화 그리고 여행지가 소개 될 예정이다.


[세상의 모든 경은이에게]는 이십 대를 사는 친구들에게 오지라퍼 이모가 보내는 가이드 북이다. 감히 그럴 수 있길 바란다. 부디 다정한 이모이길.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