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만남
너를 처음 본 건 2002년 8월 20일이었어. 그때 우린,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서 네 탄생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했어. 잃어버린 가족 구성원을 네가 아주 밝은 빛으로 채워주는 것 같았거든.
언니가 너를 낳으러 강남역 산부인과에 갔을 때, 나는 일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태어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처음부터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니었어. 너는 저녁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어. 언니는 꽤 오래 진통을 겪었고 결국엔 수술실로 들어가야했지. 그래서 우린 너가 태어나는 걸 볼 수 있었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삼촌과 형부, 나는 밖에서 언니가 나오길 기다렸어. 한참이 지나서 네가 나오고 언니가 나왔어. 언니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우리는 너를 보러 신생아실로 달려갔지. 너는 인큐베이터같은 곳에 들어가 있었지만, 아프거나 그런건 아니었어. 그냥 막 태어난 아이들이 일단 그 안에서 며칠을 지내는 것 같았거든. 그때 우리는 모두 조금 울었어. 나는 그때 형부가 우는 걸 처음 봤어. 그 후로 내내 그 일로 형부를 놀렸어. 사실 우리 다 울었어. 삼촌도 울고 나도 울었지. 하지만 우리의 눈물은 당시 너무 흔한 거였어. 할아버지를 잃으면서 우린 매일 울었거든. 그런데, 너를 마주했을때의 눈물은 전혀 다른 눈물이었고 우리도 그걸 알았어. 그건 슬픔보다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지. 많은 실망 끝에 네가 한 줄기 희망처럼 우리에게 온거야.
"저 허벅지 좀 봐."
누군가 울면서 말했고 우리의 시선은 너에게로 향했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순수한 너에게로 말이야. 그리고 우린 일제히 폭소하고 말았어. 네 허벅지가 거기 있는 모든 아이들 중에 제일 굵었거든. 인큐베이터가 네겐 너무 좁아 보일정도로 말이야.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숙녀에게 말이야. 근데 정말 그 순간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슬라이드 사진 한 장처럼 내 뇌에 남아 있어. 심보르스카의 시의 한 구절처럼 말이야.
"우리는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자주 여행하지만
기억 대신 슬라이드 사진을 가져온다."
[비독서] 중에서
우리 가족은 너 하나로 뭉칠 수 있었어. 우린 매일 일이 끝나고 모여 함께 밥을 먹고 너를 돌봤어. 물론, 너를 가장 많이 돌본 건 언니였지만 말이야. 사실 철이 없고 어렸던 나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어.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는 밤에는 네게 들려 너를 꼭 보고 가곤 했어. 여행을 가서도 네 선물을 먼저 사고 내 것을 샀어. 나는 친구가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내가 그러는지 몰랐어. 정말 신기하지? 네가 태어나기 전에는 항상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네가 태어난 후로 나는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걸 알게 됐어. 아니, 너를 사랑하는 거였겠지.
기억에 남는 한 날이 있어. 그날 나는 혼자 너를 보게 됐어. 너는 이상하게 집안에서는 안 자고 밖에 나가서 걸으면 잠들곤 했어. 포대기로 너를 업고 공원을 걸었어. 새벽이었고 아무도 없었지. 목이 늘어난 반팔에 무릎이 나온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어.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나를 식혀줬지. 집에서 재우려고 한참 애쓰다가 안 되겠어서 밖으로 나온거였거든. 분홍색 이불같은 옛날식 포대기를 둘러 묶고 이제 막 아이를 낳아 서툰 새댁처럼 허리를 잔뜩 숙이고 있었지. 문닫은 상가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지금도 나는 기억해. 꼭 남편이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는 아내같은 모습이었어. 삶에 찌들고 지친 티가 역력했어. 그 장소에서 바로 신파극의 드라마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는 자장가를 부르며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어. 그때 갑자기 한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어.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지. 너도 알지만 난 그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잖아. 나를 힐긋거리며 지나간 그 무리는 내 동창들이었어. 예쁘게 차려입고 세련된 화장을 하고 그 아이들은 나를 스쳐갔지. 그런데 말이야, 언니 아이라고 말할만큼 우린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도 하고 이미 멀어진 동창들에게 "사실은, 우리 언니 아이야!" 라고 소리 지를 수도 없었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역시나 얼마 안가서 내가 아이를 낳아서 초라한 몰골로 새벽에 동네를 돌더라는 소문이 돌았어. 그 중에 어떤 아이는 여전히 그때 내 등에 엎혀있던 아이가 내 아이라고 믿을 수도 있어.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는 그게 너무 신경쓰였어. 그래도 네가 예쁜 건 감출 수 없었지.
내가 처음 운전면허증을 따고 제일 먼제 태운 사람도 너였어. 너만 데리고 어딘가로 가야했는데, 내가 너를 앉히며 "이모는 초보니까 조용히하고 있어야돼."라고 했고 너는 정말 이십여분의 거리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어. 영화를 볼때는 어떻고. 겨우 세 살이었던 너는 상영시간 한 시간 반 동안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서 집중해서 보는 아이였어. 그러고보니 나는 너와 꽤 많은 데이트를 했었네. 함께 [호로비치를 위하여]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적이 있었어. 너는 영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모! 저 오빠 불쌍해서 어떻게해?"라고 소리질렀어. 너무 슬픈 장면이었는데, 모두가 심각한 네 목소리에 웃고 말았어.
종이 봉지 공주는 내가 너에게 사준 첫 책이었던 것 같아.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야. 이때 책먹는 여우도 같이 사줬는데 당시에 너는 이 책들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어. 종이 봉지 공주 책을 읽는 내내, 너는 고개를 갸웃거렸어. 한동안 뭔가 이상한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어.
"왜?"
"이상해."
"왜 공주가 왕자를 구해?"
책 내용을 말하자면, 로날드 왕자와 공주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어. 어느날 용이 나타나 성을 불태우고 왕자를 잡아가버려. 이때 공주의 아름다운 드레스도 다 타버리지. 공주는 종이봉지를 옷으로 만들어 입고 왕자를 구하러가. 용이 내뿜는 불을 뛰어넘어서 왕자를 구하러가지만 왕자는 공주가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투덜대지.
"너 꼴이 그게 뭐야?" 라고 왕자가 말해. 방금 목숨을 걸고 자기를 구하러 온 공주에게 말이야.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결국 공주는 겉만 번지르르한 로날드와 결혼하지 않기로해.
"왜 공주가 예쁘지 않아?"
너는 세상의 모든 공주는 예쁘다고 그래서 공주라고 내게 불만을 표했지. 나는 공주가 왕자를 구하느라 예쁜 옷을 입을 수 없었다고 했어. 옷차림은 중요하지 않고 꼭 왕자만이 공주를 구하는 건 아니라고. 그러고도 너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어. 그때 너는 내가 하는 이야기도 좋아하지 않았어. 나는 자주 동화를 다르게 각색했거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나는 토끼가 가다가 잠들어서 호랑이에게 잡혀먹혔다고 했고 그러면 너는 소리를 지르며 다시 이야기를 하라고 화를 냈어.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려놓으라고 말이야.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여러편의 이야기를 만들었어. 네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고를 수 있도록 말이야. 그리고 네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 우린 자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이야기했어.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서, 길을 걸으며 너는 신화 속 인물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내게 물었지. 이후에는 너가 나보다 신화 속 인물들을 더 많이 알았어.
어느새 성인이 돼 유아교육학과에 간 너는 [종이 봉지 공주]를 발표 작품으로 썼다고 말했지.
좋은 책이라고 말이야. [책 먹는 여우]도 그렇고. 나는 뭔가 뿌듯한 감정을 느꼈어.
내가 너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았거든.
지금도 나는 같은 마음이야. 나는 네가 종이봉지 공주처럼, 독립적인 여성이면 좋겠어.
삶도, 사랑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그런 성숙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
무엇보다 나는 너가 너와 친해지는 방법을 알았으면 좋겠어.
네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면 인생이 더 신나지 않을까?
나는 이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거든. 나는 타인의 눈에 예쁘고 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나는 항상 나와 싸웠어.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걸 정말 모르겠었거든. 그걸 찾을 여유가 없었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 내가 사랑하는 걸 많이 곁에 두고 보는 것, 그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었어.
나는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좀 더 빨리 찾았으면 좋겠어.
그 안에 소설과 시, 인문학이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어려움에 부딪힐때마다 이 모든 것들이 너를 지탱하는 힘이 되면 좋겠어. 언제나 네 안이 풍성한 사람이길 우리 모두는 바라고 있어. 너, 나의 조카(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경은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