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된 삶과 계단형 사다리
시를 고칠 때면 난 내가 마치 통조림 파인애플이 된 양 자괴감에 푹 절여져서는 다시 새로운 것에 절여질 준비를 한다. 담백에서부터 멀어지는 과정. 나는 큰 소리로 우는 체를 한다. 엉엉. 책상 위 널브러져 있는 시집, 위대한 젊은 시인들의 이름을 손으로 몇 번 훑는다. 영영. 의미 없는 수정을 반복한다. 수정하면 또 수정할 게 생긴다. 마치 의미 없는 번식 대잇기 게임 같다. 수정은 수정을 낳고. 결국 완벽하지 못한 채로 완성하는. 그리고는 무슨 심즈 할 때 체력 풀보충 치트키 쓰고 난 뒤의 허망함과 무료함 같은 걸 느낀다. 나의 바람은 내 글이 표현에서 그치는 것. 기술적인 부분은 배제한 채로 코 앞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예전의 나는 소설보다 시가 심상을 표현하기에 용이한 줄 알았다. 그렇지만 현재의 나는 조막만 한 엽편의 글을 며칠 동안 수정하고 멈춰있는 글 속 흐르는 양상을 지켜본다. 용이하지 않은 시가 있다. 요즘은 라틴 재즈를 듣는데 글을 수정(최악의 행위) 할 때는 듣지 않는다. 질려버린 음악을 듣는다. 쇼팽 왈츠 같이, 닳고 닳아 이제는 음률이 들리지 않는, 그저 귀의 빈 부분을 채워 줄 뿐인 음악을…
몇 주째 줄글을 쓰지 않았다. 산문시를 제외하면. 끔찍한 자기 복제적 시를 적어내리기만 했다. 내 감상은 철저히 배제한 채 불행서사 몇 편을 완성했다. 듣도 보도 경험도 못한 가난 우울 죽음 서사를 써냈다. 그것들은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를 조각 기억들 이어 붙인 것 그리고 얼룩덜룩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페르소나를 쓰면 안 됨. 그렇지만 내가 화자의 연장선이 되는 건 가능함. 많은 의문이 있더라도 규칙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렇지만 소고집 탑재된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저 감대로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대로… 그러니까 나는, 가난한 자취생이 되기도 하다가, 애인과 이별한 상실의 사내가 되기도 하다가, 어머니께 정서적 학대를 받았던 사십 대 장년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거의 로테이션이다. 한 달마다 찾아오는 월례행사 같은. 심상 돌려 막기. 이럴 때마다 나는 머리의 한계를 느낀다.
쇼팽의 왈츠를 반복재생한 채로, 혹은 반복재생 하더라도. 나는 천박하고 불행한 기분을 그대로 느낀다. 그건 요동하는 생선회 같기도 경련하는 뭉티기 같기도 하다. 글 쓰는 데에 권태기가 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글쓰기를 중단한다. 사무용 의자 방석에 닿은 허벅지 살갗이 간질간질 아린다. 내 불행서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모든 걸 중단하고 싶은 것, 음질 구린 스피커에 새총 쏘고 싶은 것, 시를 쓰기 싫은 것(시를 쓰기 싫은 것에 대한 시를 쓰는 것…), 규칙에 따를 마음이 들지 않는 것, 해가 뜨고 짐에 따라 생활하고 싶지 않은 것… 나는 무심해진다. 곧 슬퍼진다.
슬프거나 화가 날 때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은 음악인데 피아노 선율을 듣자 참을 수가 없는 자기 연민이 솟구쳐 올라서 울음을 참았다. 그런데 잘 참아지지 않았다. 카페인 이백 밀리그람 섭취를 위해 마신 음료수 두 잔과 만 이천 원이. 파도 없이 부식돼 버린 그 단단하던 시가. 마치 끝없는 미로 같은 수정이. 모든 게 억울해서 도무지 정상적인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가 날 때마다 듣는 이 음악은 참 좋기만 한데. 언젠가 편평한 상태 안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을 때가 온다면 흐름에 맞게 화가 나버릴까 봐 음악을 정지했다. 머릿속이나 전자제품에서 나는 웅웅대는 소리 때문에 적적해서 그리고 미묘하게 속이 안 좋아져서 다시 재생했다. 혼자 있을 때면 배가 안 고프다. 요조 같이 행복도 허기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과자며 젤리며 뭐든 뜯어서 입에 넣고 보게 된다. 바삭바삭, 혹은 질겅질겅 씹다 보면 턱이 아픈데 한 봉지를 끝내야 될 것 같아서 계속 씹는다. 우물우물 턱관절의 저작 운동과 앙다문 채로 움직이는 입술 두 짝과 위아래로 요동하는 목젖 같은 것들이…
글을 쓰는 게 고역으로 느껴질 때면(주기적으로), ’글짓기’는 금칙어가 된다. ‘글짓기’라는 말을 뱉어야 할 때는 ‘그거’라는 대명사로 대신한다. 그건 글짓기가 너무 괴롭기 때문이며 글짓기를 입 밖으로 꺼낼 때면 무언가 자조적인 압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글짓기 글짓기 글짓기, 그건 나의 대체된 삶이자 유이한 걸림돌이다.